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2)화 (92/123)

92.

에리스텔라가 온몸이 뜰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 때였다.

“이제 일어났어?”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정신이 없어 문이 열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곤 태연한 모습으로 그녀의 이상 행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눈이 마주친 순간 에리스텔라는 기겁을 하며 그대로 다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리 가! 일단 저리 꺼져!

네 발을 팡팡 치며 괴로워하는데.

‘어……? 나 왜 움직이지?’

미처 이불 속에 들어가지 못한 꼬리가 하인리시온에 의해 쭈욱 당겨졌다.

이거 놔! 에리스텔라의 서글픈 발버둥이 이어졌지만 이미 하인리시온의 손바닥 위였다.

‘제길, 망할…….’

에리스텔라는 소니아가 준비해 준 차를 할짝거리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데 혼자 의식하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사실 이렇게 신경 쓸 문제도 아니지. 그냥 너무 창피해서 그런 거니까 나도 신경 안 쓸 거야.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의지만으로 외면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늘 하인리시온이 가는 곳곳마다 대공가의 고용인들은 모두 지난 연회에 대해 궁금해했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연회장에서 있었던 대한 질문을 질문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들어야만 했다.

“이러다 곧 대공가에도 새로운 분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고용인들은 기대감을 잔뜩 드러냈다.

그때마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무슨 대답을 할까 덩달아 긴장했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반응을 확인하듯 한 번 쳐다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늘리며 대답했다.

“아니. 이번 한 번이면 됐어.”

어……?

에리스텔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단호한 반응이었다.

***

에리스텔라가 그날의 소동에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하인리시온은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을 일찍 끝낸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정이 될 때까지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뒤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그대로네?”

“그러게. 정확히 자정이네.”

에리스텔라에서 여우로 돌아가는데 변수가 생겼으니 혹시 여우에서 에리스텔라로 변하는 시간에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일단 지금 상황으로는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왜 여우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었던 거야?”

“나도 모르겠어.”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평소와 달랐다. 이 사실이 갖는 의미와 변수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동안 이상한 신호 같은 건 없었어?”

“아니. 딱히 없었어…….”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여우로 변하지 않았던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어쩌다 한 번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 아니면 앞으로도 그러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에리스텔라도 동의했다.

“조금이라도 평소와는 다른 증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 그냥 기분 차이라도 좋으니까.”

“글쎄. 정말 별다를 게 없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약간 통증이 있기는 했었는데.”

“통증?”

통증이라는 단어에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냥 가슴 언저리가 아주 잠깐 욱신거리는 게 전부였어. 별로 관련이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넘어가지 말고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말해 봐.”

통증의 강도는 어느 정도였는지 한 번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번 반복되었는지. 통증이 점점 더 강해졌는지 아니면 일정했는지.

하인리시온은 집요하리만치 자세하게 물어보며 확인했다.

“혹시 몸에 무리가 오거나 하는 느낌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 절대로 허술하게 넘어가지 말고.”

하인리시온이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잔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에리스텔라가 손으로 귀를 막으며 짜증을 내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앞으로 모습이 변하기 전후로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의 걱정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우로 변할 때는 꼭 나랑 함께 있어. 그래야 변수가 발생해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는 에리스텔라도 동의했다. 당분간은 자정과 아침이 되는 시간에 혼자 있는 건 불안했다.

만에 하나 오늘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여우로 변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인리시온의 도움 없이 정체를 숨기고 있을 수 없었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우연인 건지 아니면 원래 모습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속되는 건지.

정확한 이유와 패턴을 알기 전까지는 여우로 돌아가는 순간에 조심해야 했다.

혹시라도 다른 변수로 인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로 황궁에 가거나 위험한 행동은 삼가야겠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에리스텔라가 방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무심히 허를 찔렀다.

“그래서 나를 몰래 쫓아온 거야?”

“…….”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완전히 잊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왜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 사람 놀라게.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에리스텔라는 부러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끔벅끔벅.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는 태도로 버텨 볼까.

하지만 여우의 복슬복슬한 얼굴은 오래가지 않아 사실을 인정하며 새침해졌다.

“확인하려고 한 거야.”

“뭘?”

하인리시온의 입꼬리는 이미 전부터 씰룩거리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고 짓궂은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날 내가 하인리시온을 뒤쫓아서 훔쳐본 건 맞는데. 내가 내 무덤을 판 거지.

에휴휴휴휴—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전부 인정할 수는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비장한 각오로 말을 쏘아 냈다.

“네가 유독 그 영애에게 관심을 보였잖아.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혹시 저 영애가 흑마법과 관련이 있나.”

혹시 틈이라도 보이면 하인리시온에게 반박을 당할까 봐 에리스텔라는 숨도 쉬지 않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네가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나.”

전부 핑계였다.

질투해서 몰래 훔쳐보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왜 저러지?’

어디 뭐라고 말하나 보자 하는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던 하인리시온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얄밉게 웃고 있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멍한 얼굴로 에리스텔라를 바라봤다.

‘뭐야. 불안하게 왜 저런 반응이야?’

에리스텔라가 당황하기 무섭게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

“어……?”

에리스텔라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알고 있었냐니. 무얼…… 에리스텔라의 큰 눈이 끔벅거렸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던 하인리시온의 눈꺼풀이 멈췄을 때, 에리스텔라의 눈이 사정없이 커졌다.

“진짜야?”

하인리시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대충 쥐어짜낸 변명이 어쩌다 보니 적중할 리가 없잖아.

“진짜 알고 있던 게 아니라 그냥 해 본 말이었어?”

하인리시온이 허무해 하며 하는 말이 에리스텔라에게는 쐐기를 박아 주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하인리시온에게 청혼이 밀려드는 틈에 흑마법사들이 공작을 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에리스텔라는 그 가능성을 지금까지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 나니 머쓱해졌다.

“내게 청혼서를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야.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하인리시온은 어쩔 수 없는 척 황제의 배려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 정황이 있어서 이번에 일부러 대화를 나누면서 알아봤어.”

자초지종을 전부 알게 되고 나니 에리스텔라의 얼굴은 다시 벌겋게 달아오르려고 했다.

어제 연회에서 그것도 모르고 했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리스텔라가 양손으로 가리고 있던 눈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그래서 누군지 알아냈어?”

민망한 건 민망한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정확히 흑마법과 관련된 건 아니었어.”

“뭐야? 그럼 아무것도 못 알아낸 거야?”

하인리시온의 진짜 목적을 알고 나니 이번에는 아쉬웠다.

“알아낸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이번에는 다른 게 목적이었던 거 같아.”

황궁 연회에서 하인리시온에게 다가온 영애들 중 여럿이 비슷한 화제를 꺼냈다.

“다른 목적이 뭔데?”

에리스텔라는 어느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완전히 내린 채 묻고 있었다.

“요즘 연회가 있을 때마다 디아클렌 자작이 관심을 받고 있는 건 알지?”

“응. 그거야 보이니까.”

“그게 목적이었던 거 같아. 나를 디아클렌 자작의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것 같았어.”

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디아클렌 자작가가 유통하는 물건을 언급하거나 보여 주면서 하인리시온의 반응을 살피고는 했다.

그들은 모두 하인리시온이 흥미를 보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걸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에리스텔라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하인리시온이 태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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