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이대로라면 곧 마주칠 게 뻔했다.
에리스텔라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지금 자신은 여우가 아니었다. 완전한 황녀 에리스텔라의 모습이었다.
이대로 마주쳤다가는 제대로 망할 게 뻔했다.
산 넘어 산이네. 왜 하필 저쪽에서 오는 거지.
하지만 불평도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에리스텔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디아클렌 자작을 피해서 숨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나무 한 그루도 없이 키 작은 꽃들만이 만발한 정원이었다.
이곳에 당장 그녀가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일단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에리스텔라는 디아클렌 자작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돌아섰다.
하지만 완전히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는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그때까지 과연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어색한 걸음걸이로 한 발 두 발 내디딜 때였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붉은 기운이 에리스텔라의 눈가에 드리웠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건 에리스텔라가 곧 여우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어쨌거나 에리스텔라에게는 다행이었다.
적당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까지만 간 다음에 여우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그다음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도 디아클렌 자작은 에리스텔라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제 됐어. 저기 나무 뒤에는 풀도 우거진 편이니까. 저기까지만 가면 돼.’
에리스텔라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 혹시…… 잠시만요.”
뒤에서 디아클렌 자작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스텔라는 철저하게 무시하며 오로지 앞만 보며 걸어갔다.
그리고 겨우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긴 에리스텔라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금방이었다.
이대로 디아클렌 자작이 지나가 주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이 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슬슬 초조해졌다.
동이 틀 때가 되었으니 곧 여우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자.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서서히 태양이 높이 솟아오르며 동이 트는 순간.
에리스텔라는 이제 됐다 싶었다.
일단 여우의 모습을 하면 지금 상황을 얼마든지 넘길 수 있으니까.
‘어……? 왜 이러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해는 이미 높이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여우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에리스텔라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원래 상태로 안 돌아오는 거야?
초조하게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필 왜 지금 이런 변수가 나타난 거지.
아직 그의 정체가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절대로 디아클렌 자작에게만큼은 들켜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미 그는 에리스텔라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쫓아오는 거 같은데.’
이대로라면 디아클렌 자작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에리스텔라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디아클렌 자작을 돌파해서 마차까지 달리거나 아니면 마법을 써서 이 장소를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정체를 들킬 위험이 굉장히 높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나. 이대로 들키는 것보다야 뭐라도 하는 게 낫지.
결심을 한 에리스텔라가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하인리시온이 보였다.
“……!”
찰나의 차이로 하인리시온이 먼저 에리스텔라를 찾아온 것이다.
조금 전까지 하인리시온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지워졌다.
“시온. 아직도 여우로 돌아가지 않아.”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에리스텔라가 다급하게 말하자 그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땅히 자리를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쏙 들어갔다.
“내 목을 끌어안아.”
하인리시온이 작게 속삭이자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고민하거나 망설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끌어안은 순간 뒤쪽에서 자작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께서 여기 계셨군요.”
자작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자작은 여기까지 웬일입니까.”
“아는 얼굴을 본 거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자작은 하인리시온에게 안겨 있는 에리스텔라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하인리시온에게 안겨 있는 상대의 얼굴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럼 보시면 알겠지만 좀 물러나 주겠습니까.”
그러자 하인리시온이 불쾌함을 피력하며 에리스텔라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보여 줄 수 없다는 듯이.
이쯤 되면 적당히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디아클렌 자작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능청스럽게 하인리시온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걸어 왔다.
“오늘 대공 전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는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뵙네요.”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데.”
하인리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쉽지만 나중에라도 저한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디아클렌 자작은 그냥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제안했다.
자꾸만 물고 늘어지듯이 말을 이어 가며 힐끔거리는 디아클렌 자작의 속내가 불쾌했다.
하인리시온이 그를 향해 좀 더 세게 밀어붙이려고 할 때였다.
“대공 전하께서 벌써 상대를 정했는지는 몰랐습니다.”
일부러 하인리시온과 함께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떠보기 위해 묻는 것이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
그걸 모를 리 없는 하인리시온의 날 선 목소리가 그를 향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인리시온은 일부러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에리스텔라를 끌어안은 팔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것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하하. 아닙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디아클렌 자작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유유히 물러났다.
그러자 에리스텔라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살짝 풀렸다.
“잠깐만. 조금만 더.”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목을 좀 더 끌어안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돌아설지도 몰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하인리시온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일단 마차로 가자.”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한쪽 팔로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감싸며 걸음을 옮겼다.
에리스텔라는 어떻게든 얼굴을 숨기기 위해 하인리시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잠시 숨을 쉬기 어려워서 고개를 살짝 들자 하인리시온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쌀쌀한데 하인리시온의 귀가 더위를 먹은 것처럼 열이 올라 빨갛게 보였다.
‘덥지는 않은데. 아까 긴장해서 그런가.’
에리스텔라가 의아해하며 쳐다볼 때였다.
시선을 의식한 하인리시온이 팔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살짝 눌렀다.
저절로 고개가 다시 내려간 에리스텔라가 마차에 도착해 다시 하인리시온을 바라봤을 때는 언제 발갛게 달아올랐었냐는 듯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직도 그대로지?”
“나도 모르겠어. 이런 적은 처음이라.”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혹시 이렇게 여우로 돌아가지 않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런 기대는 대공가에 도착하기 직전 여우로 변하면서 사라졌다.
‘뭐야. 다시 돌아왔잖아…….’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놀라서 그런가 심장이 욱신거리는 듯 통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에리스텔라는 밀려오는 실망과 함께 그대로 잠에 들었다.
여우로 돌아오면 체력도 함께 줄어들면서 생기는 증상이었다.
***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에리스텔라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방에 하인리시온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숨이 꼴깍 넘어갔을 거야.’
여우의 모습인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붕붕 내젓고 이불을 마구 헤집으며 발버둥 쳤다.
오늘 있었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내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마음이 한결 가벼울 텐데.
‘미쳤나 봐……!’
하인리시온의 품에서 느꼈던 모든 감촉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오히려 에리스텔라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그거야말로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리고 뻔한 변명이니까!
그런데 그 상대가 무려 하인리시온이라니…….
만약 거기서 로맨스 소설의 흔하디흔한 전개처럼 입이라도 맞췄다면 에리스텔라는 베개를 백 개쯤은 뜯었을 것이다.
‘…….’
에리스텔라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었다.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뭐야? 나 방금 아쉬워한 거야? 아니지? 에리스텔라 정신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