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
하인리시온의 주변으로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하인리시온은 간간이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심인가 보다.
에리스텔라가 조용히 하인리시온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이러다가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를 자신의 남편, 가문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는 모습만 보게 될 게 뻔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바닥을 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는데.
‘어……?’
디아클렌 자작이었다. 지난번 기부회에서 그를 본 적 있었다. 최근에 뚜렷한 사업적 성과를 보여서 하인리시온과 로웬이 언급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여우를 빠안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
끈적하고 의뭉스러운 시선.
어쩐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뭐지. 왜 이렇게 보는 거야. 부담스러운 시선에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뒤로 뺄 때였다.
“네가 그 유명한 여우구나?”
디아클렌 자작이 에리스텔라를 향한 호기심을 보이며 한쪽 무릎을 굽히곤 시선을 맞췄다. 그의 휘어진 눈꼬리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귀엽게 생겼네.”
그러면서 여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오늘 여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하인리시온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디아클렌 자작도 같은 이유로 이러는 걸까.
에리스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 역시도 디아클렌 자작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기에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지난번 최면에 빠졌던 일 이후로 에리스텔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에밋이라는 소년.
그 소년과 지금 눈앞에 있는 자의 얼굴이 어딘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이 자라면 이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였다.
“참 예쁜 황금색 눈동자를 가졌구나.”
디아클렌 자작이 에리스텔라의 눈을 빤히 보더니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쁜 눈동자야.”
오소소소-소름이 돋았다.
디아클렌 자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에리스텔라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프루투 지역에서 에리스텔라와 전투를 벌였던 흑마법사.
무슨 수를 썼는지 그때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그자가 분명했다.
에리스텔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디아클렌 자작을 향했다.
분명 그는 흑안이 아니었다. 그 흑안은 어릴 적 만난 적 있던 에밋이라는 소년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저 눈빛만큼은 흑마법사 데클렌과 똑같았다.
‘대체 누구지…….’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다만 적어도 그가 평범한 자작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밋과 흑마법사 둘 중 하나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에리스텔라가 디아클렌 자작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마찬가지로 여우를 빤히 보던 그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눈이지.”
그의 시선이 마치 속속들이 그녀를 파헤치는 듯했다.
순간 섬뜩했다.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디아클렌 자작이 여우를 안아 들기라도 할 생각인지 팔을 뻗어 왔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디아클렌 자작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뒷걸음질 칠 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그녀를 단숨에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번쩍 안아 들고 있었다.
“하여간 가만있지를 못하는구나.”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나무라며 디아클렌 자작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쌩하니 걸음을 돌렸다.
자정이 되어 가자 에리스텔라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이번 연회의 또 다른 목적이기도 했다.
에리스텔라와 황제는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단둘이 만나고 있었다.
“이게 지난번에 말한 그림이야.”
황제가 가지고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 속 한 명은 초대 황제 폐하시지.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어.”
제국은 건국 이후에 건국에 일조한 이들을 기록하기 위해 수많은 벽화와 초상화를 남겼다.
그 당시의 자료는 차고 넘친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자료를 찾아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은 없었다.
“아마 이 사람이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추정만 하고 있는 중이야.”
“만약 이 사람이 정말 흑마법과 관련이 있다면…….”
에리스텔라와 황제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흑마법사라면 황제와 함께 그려진 초상화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사실 선대 때부터 마법사의 수는 조금씩 분명하게 줄어들고 있었어.”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황녀로 지내면서 마법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직접 만났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 제국을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법사는 얼마 되지 않는 게 현실이야. 그나마 너의 존재가 그런 위기감을 상쇄시켜 주었었지.”
지금까지 마법사의 수가 줄어든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이유 역시 강력한 마법사인 에리스텔라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여겼었지만 그러기에 황제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너에게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무게를 지도록 했었구나.”
“그 정도는 별로 티도 안 나던데?”
에리스텔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털어 냈다. 그걸 무거운 짐이라고 여기면서 부담스럽게 여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기꺼웠다. 내가 사랑하는 제국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건 황제와 에리스텔라가 말하지 않지만 동시에 같이 공유하고 있는 마음이기도 했다.
에리스텔라는 황제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창밖을 보아하니 힘들 것 같았다.
“벌써 가려고?”
“응.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가려고.”
“그래. 라라. 곧 또 오라비를 보러 올 거지?”
황제가 아쉬워하며 하는 말에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당연하지. 또 올게!”
에리스텔라가 황제를 끌어안으며 인사했다.
벌써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데도 그녀는 오빠와 예전과 같은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감격스러웠다.
***
에리스텔라는 황궁 구석구석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혼자서 움직이는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끔 하기에 더 용이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아델라시아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향할 때였다.
재잘거리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단 몸을 숨기고 상대가 누구인지 지켜봤다.
‘어……?’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인리시온과 브리아나 영애였다.
두 사람은 다정히 대화를 나누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단둘이 여기까지 온 거지?’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에리스텔라는 끝내 외면하듯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채 열 걸음도 가지 못한 채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을 뒤쫓기 시작했다.
에리스텔라는 어렵지 않게 하인리시온과 브리아나 영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뒤를 쫓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자괴감이 찾아왔지만 이미 여기까지 쫓아온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물론, 이건 샬롯은 물론이고 소니아에게도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하인리시온을 쫓았다.
정말로 브리아나에게 관심이 있기라도 한 건가.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시온과 브리아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도 좋은 곳이네.’
두 사람이 따로 무슨 대화를 나누고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참을성이 없었나. 에리스텔라는 스스로를 되돌아볼 정신도 없이 멀리 있는 둘의 대화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천하의 에리스텔라 르노 리오나르프가 남의 뒤를 스토커처럼 쫓는 모습이라니.
들킨다면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었다.
에리스텔라가 혼란과 자괴감에 감정이 오락가락 할 때였다.
대화를 나누던 하인리시온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에리스텔라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흥분해서 마력을 조절하지 못했나.’
에리스텔라는 최대한 몸을 숨기면서도 아차 싶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이미 뭔가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순간 에리스텔라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꽂히는 시선은 분명했다.
제기랄. 지금 하인리시온이 눈치챈 거 맞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하인리시온은 적어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고 한 발 더 나아가서는 그게 에리스텔라일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순간에 에리스텔라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도망가자.
현장을 벗어난 다음에 발뺌하면 어쩔 거야. 내가 아니라고 버티면 하인리시온도 어쩔 수 없겠지.
적어도 두 사람을 쫓아가서 훔쳐봤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하인리시온에게 잡히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달린 후에야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휴우.
다행히도 하인리시온이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빨리 마차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뒤를 살핀 에리스텔라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서둘러 마차로 향하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뒤가 아닌 그녀의 앞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난관이 나타났다.
‘왜 저기서 저놈이 나타나는 거야?’
맞은편에서 유유히 걷고 있는 디아클렌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