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6)화 (86/123)
  • 86.

    “그때 우리가 안 갔으면 그대로 세뇌에 걸릴 뻔했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를 믿어?”

    에리스텔라가 비딱하게 물었다. 비록 그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다지 끈끈한 믿음도 없으면서 에리스텔라를 믿고 파멸을 자초했다는 말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에리스텔라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아뇨. 황녀 전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제가 그 자리를 만든 의도를 아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

    그레타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하인리시온에게 닿았다.

    “알고 있었잖아요.”

    “…….”

    그레타는 정확히 하인리시온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원하는 결말을 위해서는 내가 세뇌에 걸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고요.”

    만약 타이밍이 어긋나거나 자칫 잘못하면 그녀가 어떤 꼴이 될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인리시온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하인리시온은 그레타와 라테른 후작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그녀를 믿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때문에 그레타 영애를 비롯한 후작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고, 라테른 후작의 속셈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은밀하게 알려 준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그리고 그 현장을 덮치는 것만큼 흑마법과의 연관성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레타의 말은 하인리시온을 원망하고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딘가 후련하다는 듯이.

    “좋은 판단이었어요.”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져 갔다.

    “대공 전하는 그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서였지만 어떤 이유였든 저는 제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하인리시온은 그레타의 목적 달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하인리시온을 빤히 쳐다보던 그레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곧 떠날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이곳에는 어떤 미련도 없어서요.”

    그녀는 곧 저택을 떠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이거.”

    그때 에리스텔라가 그레타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내 시녀였던 너에게 주는 거야.”

    그 안에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에리스텔라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많이 들어 있지는 않아. 고작해야 정말 급할 때 쓸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될 거야.”

    “…….”

    그게 에리스텔라가 내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레타는 상자를 잡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챙겼다.

    그걸로 끝이었다.

    에리스텔라는 마지막 인사말도 없이 돌아서 하인리시온과 함께 후작가를 떠났다.

    ***

    대공가로 돌아온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향해 물었다.

    “왜 아무 말 안 했어?”

    하인리시온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듯 에리스텔라를 돌아보았다.

    “그런 계산적인 이유가 아니었잖아.”

    “…….”

    “상황을 정리해 보니까 대충 알 거 같던데.”

    그레타가 한 말을 들었을 때, 에리스텔라는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짐작이 갔다.

    분명 하인리시온이 손에 넣은 정보는 라테른 후작의 동향이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그레타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과거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겠지.

    하인리시온의 눈빛에 열기가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게 보였다. 그 눈을 본 에리스텔라는 확신했다.

    “사람은 가끔 날뛰고 싶을 때는 날뛰어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건 하인리시온이 바라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인리시온은 그레타 영애의 위험을 모른 척한 게 아니라 그녀의 각오를 지지한 거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미련이 덜하다는 걸…… 알아서 모른 척해 준 거잖아.”

    하인리시온의 눈에 겹쳐 보였을 테니까.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후회들이…….

    “원하는 대로 해 보라고.”

    이미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더라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조금이라도 털어 낼 수 있도록.

    그러고 싶었던 순간이 하인리시온에게도 있었었으니까.

    그때가 떠올랐던 거겠지.

    에리스텔라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인리시온이 그걸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게 자신이었으니까.

    말없이 듣고 있던 하인리시온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에리스텔라를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에리스텔라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손이…… 꾸욱.

    “……?”

    에리스텔라가 어리둥절해하기도 전에 하인리시온의 매끈하게 쭉 뻗은 검지가 그녀의 미간을 정조준해서 누르고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심각하게 모여 있던 에리스텔라의 미간을 쭉 펴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레타 라테른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야 해?”

    “어?”

    “안타까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라테른 후작 영애가 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리고 하인리시온은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냉정하게 말하던 하인리시온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잡고 싶었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만든 것뿐이야.”

    하인리시온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에리스텔라는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직도 미간을 꾹 누르고 있었으니까!

    “……알겠으니까 이제 이거 좀 놔.”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뒤로 빼면서 미간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 냈다.

    “잠깐만. 확인 좀 해야겠어.”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에리스텔라의 미간의 정중앙이 빨간 점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꾹 눌렀으면 자국이 남아!

    하인리시온을 노려보던 에리스텔라의 입가에서 푸훗-웃음이 나왔다.

    ***

    왜 또 몸이 작아져 있지?

    하인리시온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설마 또 흑마법사가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하인리시온이 주변을 경계하며 상황을 살피는데.

    ‘지난번에 최면에 당했던 거랑은 다른데?’

    환상이 아니라 정말로 하인리시온 본인이 어려져 있었다.

    설마 이거 꿈인 건가?

    그때였다. 어린 하인리시온의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하얀 솜뭉치가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동그랗고 보슬보슬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게…… 먹는 건가?

    어린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깨물었을 때였다.

    “아앗! 누가 깨물었어?!”

    벼락처럼 내지르는 괴성과 함께 보슬보슬한 털뭉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어…… 여우……?

    에리스텔라? 왜 네가 여기서 튀어나와?

    “……!”

    꿈이었나.

    눈을 뜨니 보이는 건 하얀 천장뿐이었고, 옆을 돌아보니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의 여우 한 마리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에리스텔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과거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일을 떠올리면서 신경을 썼었던 거겠지.

    “…….”

    에리스텔라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하인리시온은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기억에서 한결 편해진 상태였다.

    더는 부모님을 떠올려도 괴롭거나 하지 않았다. 에리스텔라를 바라보는 하인리시온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자기 멋대로 구는 척하면서 엄청 눈치 본단 말이야.

    그때,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에리스텔라가 인상을 쓰며 뒷발로 옆구리를 문질거렸다.

    꿈속에서 하인리시온이 깨물었던 그 부분이었다.

    ***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집무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기분 나쁜 꿈을 꾼 거 같아.]

    잠에서 깬 후부터 뭔가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에리스텔라는 인상을 썼다. 그러더니 하인리시온의 어깨에 올라와선 그를 노려봤다.

    “나는 왜 노려보는 거야?”

    [몰라. 근데 왠지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쁜데?]

    그냥 성격이 나쁜 건가. 본능이 날카로운 건가.

    하인리시온이 모른 척 발뺌하면서도 에리스텔라가 어떤 꿈을 꿨는지 궁금해졌다.

    나랑 같은 꿈일 리도 없는데.

    그래도 때마침 집무실에 도착해 에리스텔라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무실에서 로웬이 묘한 얼굴을 하고서 하인리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일단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전하께 온 겁니다.”

    어라? 봉투에 이렇게 공들인 건 보통 의미가 어떤 있는 건데.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한 봉투를 빤히 쳐다볼 때였다.

    ‘이거 설마…… 그건가?’

    아델라시아 대공가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서신과 초대장이 들어왔다.

    그 많은 것을 전부 올릴 수 없으니 그중에서 선별된 것들만 하인리시온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별 작업에는 로웬의 검수가 필수였다.

    하지만 오늘 로웬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의 봉투를 직면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문턱을 밟은 적 없는 종류의 봉투였다.

    “직접 확인하시고 결정하셔야 할 듯합니다.”

    하인리시온 역시 한눈에 예사 봉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지 않도록 몇 겹으로 포장되어 있는 봉투.

    모두가 긴장하며 하인리시온과 봉투에 시선을 집중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뻔한 인사말로 시작한 내용은 중간부터 목적을 드러내는데.

    ‘……역시 청혼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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