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5)화 (85/123)
  • 85.

    소니아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맞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소니아의 말을 무시하거나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소니아가 한 가지 조언을 했다.

    “한번 상상해 보시는 건 어때요?”

    라고…….

    ‘그게 말이 쉽지.’

    에리스텔라라고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시온과 어떤 미래를 그리고 싶은 걸까.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결과는 처참했다.

    특히나, 하인리시온과 정말로 결혼까지 하는 미래는…….

    ‘으으아. 진짜 미치겠다!’

    에리스텔라가 상상 속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하인리시온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구경 중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오늘따라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조용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숙여 도리질을 쳤다. 그러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기를 반복했다.

    분명 방금 눈이 마주쳤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하얀 털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릴 정도로 뛰어오르지를 않나.

    갑자기 헤엄이라도 치는 것처럼 다리를 파닥파닥 흔들지를 않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괴상하고 수상했다.

    하인리시온은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에리스텔라가 언제쯤 눈치챌까 생각하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뭐지?”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에리스텔라가 움찔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이 언제 쳐다봤냐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다른 곳을 응시했지만, 하인리시온의 의심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눈빛이 수상한데.”

    하인리시온의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에리스텔라는 깨달았다.

    이런 실수다.

    상념이 깊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하인리시온을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고 말았다.

    그럼 당연히 하인리시온이 이상하게 여길 게 뻔한데!

    에리스텔라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본 그녀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하인리시온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에리스텔라는 여유롭게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창문 너머로 강한 햇살이 들어오면서 에리스텔라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순식간에 여우가 된 에리스텔라는 다가오는 하인리시온로부터 벗어나 재빨리 반대편으로 달렸다.

    “어디 가?”

    황당했는지 하인리시온이 뒤에서 쫓아왔지만 에리스텔라는 네 발을 더 힘차게 뻗으며 내달렸다.

    대답 대신 도망가면 하인리시온이 더 수상하게 여기기는 하겠지만 마땅한 대답이 없는 한 이게 최선이었다.

    이대로 고용인들 중 아무나 만날 때까지 달리면 된다. 다른 사람한테 폭 안기면 하인리시온이라고 더 추궁할 수 없을 테니.

    ‘여우로 변하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네.’

    결국, 여우로 변한 에리스텔라를 잡지 못한 하인리시온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뭔가 굉장히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하인리시온이 여우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저러는 걸까.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에리스텔라를 쫓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다가올 텐데.

    하인리시온은 유유히 몸을 돌렸다.

    ***

    하인리시온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집무실 문밖에서부터 은밀하게 움직이는 형체가 바로 그 증거였다.

    황궁에서 서신이 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에리스텔라가 먼저 집무실로 온 것이다.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면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슬쩍 몸을 빼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고개는 빼꼼 내민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힐긋 쳐다보며 붙잡힐까 경계를 하면서도 서신에 적힌 내용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당장 손만 뻗으면 여우를 잡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에 온 서신도 지금까지와 별반 차이 없을 테고.

    “이번에도 사적인 내용을 적어 보내셨나.”

    서신을 펼칠까 말까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하인리시온이 중얼거렸다.

    황제의 편지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매일 꾸준히 도착했다.

    게다가 에리스텔라는 그걸 볼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참지 못하고 좋아서 온몸을 베베 꼬았다. 게다가 편지가 닳도록 몇 번이나 읽고 또 읽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니 하인리시온은 지긋지긋해서 솔직히 심술이 날 지경이었다.

    하인리시온의 혼잣말에 편지의 내용을 모르는 로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이번에는 황궁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건 공식적인 일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하인리시온은 그제야 에리스텔라가 잘 볼 수 있도록 서신을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서둘러 다가간 에리스텔라는 집중해서 서신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 안에는 에리스텔라를 향한 편지가 아닌 라테른 후작가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정이 되고 브랜던 라테른 후작에 대한 처분 역시 내려졌다.

    브랜던 라테른 후작은 살려 둔 채로 가두었다. 그에게 알아내야 할 정보들이 있었다.

    “라테른 후작의 남은 가족들은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기고 떠났어.”

    하인리시온은 보좌관에게 전하는 척 에리스텔라에게 말했다.

    흑마법과 손을 잡은 건 라테른 후작뿐이라 다른 가족들은 조용히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테른 후작이라는 귀족 신분은 박탈당했고 영지는 모두 몰수당했다.

    “모두 떠나고 그레타 라태른만이 남아 있다고.”

    지금껏 누려 온 모든 것을 잃게 되자 가족들은 그를 버리고 살길을 찾아 도망갔다.

    오로지 그들과 가족으로 묶일 수 없는 그레타 라테른만이 텅 빈 저택에 남아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지나가는 것조차도 기피하는 곳에서.

    “폐하께서 그레타 영애의 처우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고 하시네.”

    그녀는 에리스텔라의 시녀였고 여러모로 관련되어 있었다.

    라테른 후작가에 대한 결정은 이미 끝이 났지만 그레타 라테른에 관해서 만큼은 에리스텔라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하인리시온이 묻는 말에 에리스텔라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흐음. 한번 만나러 가 볼까.

    마지막에 봤을 때는 정신이 없기도 했고.

    딱히 봐주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으니까.

    ***

    자정이 넘어서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조용히 라테른 후작가를 찾았다.

    후작가의 저택은 황량해져 있었다.

    텅 빈 후작가에는 고용인도 없이 그레타 영애 혼자 지키고 있었다.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저택.

    그들은 누구의 제재도 없이 텅 빈 저택을 돌아다니며 그레타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과연 이곳에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걸까.

    홀로 분주히 움직이던 그레타는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직 너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거 같아서.”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아하고 위엄 넘치는 에리스텔라 황녀가 자신의 시녀였던 죄인을 대하고 있었다.

    “한 번은 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레타는 두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인사했다.

    자리에 앉은 에리스텔라가 테이블을 손으로 스윽 닦아 보니 방치된 저택의 상태가 손끝에 새카맣게 묻어나왔다.

    “물밖에 없는데 그것도 상태가 영 아니라서요. 드릴 게 없네요.”

    더 이상 의례나 형식을 차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레타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황녀 전하에 대해 떠드는 게 신경 쓰이시는 거라면 걱정 마세요.”

    사실, 그레타의 입단속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했다.

    몇몇에게는 정체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아직 모두에게는 밝혀서는 안 되니까.

    “어디에도 말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더는 수도에 있지도 않을 거고요.”

    “이번 일에 도움을 줬다고 해서 나는 너를 용서하지는 않을 거야.”

    “제가 황녀 전하의 시녀로 몇 년을 보냈는데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잘 알면서 왜 이렇게까지 선을 넘었어.

    선을 넘지만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에리스텔라의 시선을 읽었는지 그레타가 자조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소니아가 싫었어요. 구질구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소니아는 굳세고 당당해 보였으니까요.”

    그게 자꾸만 자신과 비교하게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소니아가 자신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보고 있으면 자꾸만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레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게다가 황녀 당신이 소니아를 호의적으로 대했으니까.”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갖지 못한 것들을 소니아는 손쉽게 얻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분명 질투였다.

    “그래서 황녀 전하가 사라졌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 질투와 희열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실제로 많은 게 달라지기도 했었고요.”

    그녀는 지금 돌이켜보면 전부 허무하다는 듯 빈 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제 개인적인 복수이기도 했고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였어요.”

    그녀 나름의 사죄 표현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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