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
“두 사람이 그렇게 함께 있는 모습은 오랜만이더구나.”
황제의 입장에선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은 굉장히 생소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하인리시온과 함께 지내게 된 거지? 게다가 사이도 꽤 좋아 보이던데.”
분명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관계는 최악이라는 표현도 약하게 들릴 정도로 나빴다.
그게 황제가 알던 가장 최근까지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과거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어느덧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서로를 돕고 지키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게…… 나한테 생긴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내가 먼저 부탁했어.”
“라라. 정말 그 이유가 전부야?”
다른 이유는 없었냐는 물음에 에리스텔라는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이라는 미지의 영역에서 그녀에게는 분명 하인리시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이 여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밝힐 수 있는 사람 역시 하인리시온뿐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잘된 일이구나. 라라. 네가 혼자 있었던 게 아니라서.”
“응. 시온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에리스텔라가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보니 아델라시아 대공이 너를 대하는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더구나. 너희가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던데.”
그런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에리스텔라는 그저 하인리시온이 기르는 여우일 뿐이었다.
황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관계에 대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황제의 반응이 낯설어 자꾸만 생각에 잠길 때였다.
황제의 입꼬리가 짓궂게 슬쩍 올라갔다.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있었던 건가? 혹시 서로…….”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에리스텔라가 깜짝 놀라서 양손을 내저으면서 해명했다.
순간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흐음. 그렇구나.”
에리스텔라가 격렬하게 부정하자 황제의 눈이 아쉽다는 듯 가늘어졌다.
에리스텔라가 당황한 나머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힐 때였다.
황제가 장난스러운 웃음은 거두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에리스텔라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궁에서 살았다. 그녀가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황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에리스텔라가 황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지금껏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겨우 제대로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에리스텔라가 대공가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다.
하지만 아직 여우로 변하는 불안정한 상태로 황궁에서 지내는 건 무리가 있었다.
황제는 오랜만에 재회한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해야 할 말은 많았지만, 필요한 말은 하나뿐이었다.
“라라. 이제 너에겐 내가 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을 동생.
기특하고 대견하고 애틋한 동생을, 지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더는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오빠에게 말해야 해.”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오래전 말썽쟁이 동생이 혼나지 않도록 보호해 주던 오빠와 겹쳤다.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오빠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너와 함께 사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응!”
그 한마디가 에리스텔라에게 언제든 돌아갈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그건 에리스텔라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고 또 바라던 말이었다.
에리스텔라는 들뜬 표정으로 웃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제야말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몰랐던 든든한 울타리에 에리스텔라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에리스텔라는 어느새 여우가 되어 있었다.
***
하인리시온은 마차 앞에서 다소 초조하게 에리스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기다리시죠.”
로웬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마차 밖에서 서성이며 황궁과 이어지는 길목을 돌아봤다.
그곳으로 걸어올 사람을 기다리면서.
하인리시온은 황제가 에리스텔라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그러니 지금 저 길에서 에리스텔라가 걸어오지 않으면 그녀는 황제의 곁에 남는 걸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나야 편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가 무척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기다렸다. 에리스텔라가 직접 이곳까지 오기를. 그녀 스스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그때였다.
오랫동안 노려보던 길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에리스텔라가 아니라 황제였다.
그 모습을 본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새 다가온 황제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너의 여우를 데려가도록 해.”
황제의 품 안에 있던 여우가 폴짝 뛰어 하인리시온에게 안겼다.
여우로 변한 에리스텔라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인리시온은 황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를 품에 꼭 안으며 소중하게 챙겼다.
“제가 잘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공.”
황제가 하인리시온을 불러 세웠다.
“잘해 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인리시온은 여우를 안아 들고 마차에 탔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새 여우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고 있었다.
“집에 가자.”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우는 하인리시온의 옆에서 긴장이 풀린 듯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
잠에서 깬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여우의 모습이었다.
‘개운하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부터, 에리스텔라에게서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몸속 어딘가에서 의욕이 샘솟았다.
그건 아마도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포기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건 자포자기와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하루아침에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난 에리스텔라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고개를 휙휙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하인리시온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황궁에서부터 하인리시온이 자신을 품에 안고 온 것 같았는데.
그다음에는 침대에 누워서…….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대로 잠들었었나?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에리스텔라는 바로 방향을 정해 움직임을 개시했다.
보나 마나 하인리시온은 집무실에 있을 테니까.
‘역시 여기 있었네!’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하인리시온을 발견해 다가가는데.
“여우님. 오늘따라 더 힘차 보여요!”
아네사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감탄했다.
“꼬리도 오늘따라 더 꼿꼿하고 털도 보들보들 한 것 같아요.”
사실 에리스텔라도 오늘 방에서 나오기 전 거울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었다.
‘역시. 아네사는 알아보는구나!’
한껏 기분이 좋아진 에리스텔라는 아네사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빛내며 꼬리를 더욱 힘차게 흔들었다.
게다가 들뜬 에리스텔라는 아네사가 내민 손에 앞발을 맞대기까지 했다.
에리스텔라가 한창 아네사와 어울리고 있을 때였다.
“전하. 황궁에 관한 소식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로웬이 하인리시온에게 보고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 나도 보고 들어야 하는데.’
아네사.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에리스텔라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 상태로 쪼르르 달려가 하인리시온이 있는 책상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이미 로웬이 하인리시온에게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실의 공식적인 발표는 황제의 난치병 치료를 위한 휴식입니다.”
후후훗.
에리스텔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게 바로 황제와 에리스텔라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딱 잡아떼기.
그간 황제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흑마법의 흑자도 나와서는 안 되었다.
황제가 흑마법사에게 몇 년 동안이나 세뇌를 당했었다는 사실은 황제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흑마법사에 대한 큰 공포심과 함께 엄청난 혼란을 몰고 올 것이다.
황궁 곳곳에 남아 있는 흑마법 연루자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이번 일을 은폐해야 했다.
“그걸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식으로 돌파할 줄이야.”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암암리에 진실을 눈치를 채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 허무맹랑한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동안 치료법을 찾지 못해 병에 대한 건 비밀리에 부쳤지만, 다행스럽게도 완치했다는 것이다.
황제가 그토록 뻔뻔한 사람인 줄 하인리시온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어릴 적 그가 자주 보던 황태자 시절의 그는 자상하고 진중한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그 덕분에 확실히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황제는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더 의문을 품는다면 그건 역심으로까지 볼 수 있기에 끝까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