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사실 그건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왔기에 에리스텔라 역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록 마법에는 대단한 재능이 없었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교육은 충실히 받아 이론에는 정통했다.
황제 본인 역시 검술을 포함한 다방면에 능통한 실력자였고, 게다가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황제에게 접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그에게 세뇌를 걸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큰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황제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세뇌를 당하기 전에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뭐?”
그는 황제가 된 후, 황제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를 이어받았다.
건국을 기념하는 오래된 보물과, 기록물,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공개하지 않은 몇 점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들이 단순히 건국 설화를 다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 안에는 뭔가 숨겨져 있다.
한 번 생긴 의문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그림에 담긴 진실을 추적했고, 그 과정에서 흑마법에 닿았다.
“그리고 흑마법의 명맥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
“흔적조차 끊어져 희미하던 존재감이 십여 년 전부터 힘을 키우고 있다는 것도.”
그걸 처음으로 알게 된 게 그가 열아홉이었을 때였다.
아직은 에리스텔라와 우애가 좋았을 시기.
그가 황제로서의 치세를 하나씩 이뤄 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제국을 그 어느 때보다 번영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황제.
그 당시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에는 너무 단서가 없었지.”
열아홉. 진실의 파편을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나이였지만 황제인 그에게 어리다는 변명은 허용되지 않았다.
“무리수를 뒀지. 나도 어느 정도 허점을 보여 줘야 그쪽에서도 내가 원하는 만큼 움직일 테니까.”
황제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래도 조심한다고는 했는데.”
그로서는 허무하게 당해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에리스텔라에게 말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국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마력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도요.”
하인리시온의 의문에 황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황제는 흑마법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에리스텔라와 상의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혼자서 움직이다가 모든 일을 그르칠 뻔했다.
“……할 수 없었다.”
황제는 지금도 말하기 망설여진다는 듯 에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마 자신이 맞춰 낸 가설을 에리스텔라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에리스텔라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부황과 모후와 관련되어 있어서인 거죠? 어쩌면 황실 전체가 연루되어 있을 수도 있고요.”
이미 받아들일 마음을 먹은 듯 음성은 차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
“이미 알고 있었구나.”
황제가 설마 하던 것을 확인한 듯 침음에 빠졌다.
에리스텔라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황제는 절대로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리스텔라는 부황과 모후를 사랑했고 제국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으니까.
그렇기에 에리스텔라의 애정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에리스텔라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느라 비밀을 만드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엉켜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이 노리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구나.”
설마 하던 의심의 저울에 추가 무겁게 얹어졌다.
부황과 모후. 그리고 황실의 과거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고.
흑마법사들이 정체까지 밝히며 노리고 있는 뭔가가 황실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황실과 흑마법사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과거를 알아내야만 흑마법사가 원하는 진짜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에리스텔라와 황제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가족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가능성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결심을 다진 에리스텔라가 먼저 미소를 보였다.
그때 한창 건강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황제가 갑자기 쿨럭이면서 기침을 했다.
겉모습과 달리 약해진 몸이 버티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오빠. 괜찮아? 아니면 못 버티겠어?”
황제의 작은 이상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에리스텔라가 걱정스레 살펴보며 물었다.
이러다가 황제가 다시 쓰러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다행히 황제의 기침은 금세 진정이 되었다. 황제가 목을 가다듬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고작 기침 한 번에 이렇게 걱정을 끼치는구나.”
황제의 정신은 돌아왔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쇠약해진 몸은 바로 회복될 수 없었다.
황제가 새삼스레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앙상해진 팔은 관절마다 뼈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오랜 단련으로 다져져 있었던 그의 건강한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마르고 앙상한 몸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리스텔라의 마음 역시 무거웠다. 황제가 약해진 자신의 모습에 무력감을 느낄까 봐.
하지만 황제는 씁쓸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바라보다가도 미련 없이 시선을 떼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천천히 건강해지는 수밖에.”
황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비록 지난 시간들이 뼈아프기는 하지만 이미 끝난 일에 후회와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눈앞에 있는 가능성을 보는 쪽이었으니까.
“아델라시아 대공에게 질 수야 없지.”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시 저와 겨루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기대하도록.”
허약한 몸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세워 놓고도 황제는 태연했다.
지금은 비록 흑마법에 오래 침식돼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그는 본디 촉망받는 기사였다.
에리스텔라에 비해 눈에 띄는 마력을 지니진 못했으나 검에 있어서는 천부적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언정 그가 이전처럼 돌아간다면 하인리시온도 쉬이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다시 이전처럼 제국을 수호하고 번영토록 하는 황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보다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게 있는데 말야.”
황제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현재 황제와 에리스텔라 그리고 하인리시온이 있는 방과 외부는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보호막은 물론이고 외부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된 상태였다.
황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뭔가를 숨기기 위해 더욱 철저히 공간을 분리한 듯싶었다.
황제의 시선이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이제 설명을 좀 들어야 할 거 같은데. 라라.”
“응?”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몇 번 의식이 돌아온 적이 있거든.”
황제가 에리스텔라를 빠안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 분명 내가 뭘 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에리스텔라는 땀이 삐질 나왔다.
‘그때 정신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구나.’
이런. 오빠의 시선이 너무 뜨겁다. 자신도 흑마법에 당한 상태라는 걸 안다면 오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삐질삐질.
시선을 피하며 에리스텔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지금과 같은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는 건 밤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만이야.”
나머지 시간은 여우의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숨긴 채 대공가의 여우로 지내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에리스텔라에게 벌어진 자초지종을 알게 된 황제의 얼굴이 한층 험악해졌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하루 중 일부는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잖아.”
에리스텔라가 밝게 말할수록 황제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아 주마.”
황제가 결연하게 다짐했다.
자신이 그동안 당했던 고통보다는 에리스텔라가 지금 처한 상황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오빠가 너를 지켜야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황제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일 때였다.
창가를 돌아본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아침이 온다.
여우로 모습이 변하면 더는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야 했다.
하인리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리스텔라에게 눈짓했을 때였다.
“아델라시아 대공.”
황제가 먼저 하인리시온을 향해 말을 이었다.
“에리스텔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황제가 에리스텔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명백한 요구에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에리스텔라에게 머물렀다.
자신이 없을 때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 어쩌면 대화가 끝나고 나면 에리스텔라는 함께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하인리시온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인리시온은 혼자 돌아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답지 않게 마지막 문을 나서기 전, 에리스텔라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황제를 향해 돌아선 에리스텔라의 등밖에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