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
시간은 금세 흘렀다.
하인리시온은 마법사로서 기사단장과 함께 황궁을 수호하고 있어 황궁 내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덕분에 에리스텔라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황제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직 깨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에리스텔라는 안심이 되었다.
황제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린 에리스텔라는 창문을 슬쩍 열어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바람을 쐬다가 다시 문을 닫을 때였다.
자리를 비웠던 하인리시온이 돌아왔다.
“답답해?”
“아니. 그냥 잠깐 본 거야.”
에리스텔라는 밤마다 달의 모양이 바뀌는 걸 보면서 또 하루가 지나갔음을 확인했다.
보름달이 뜨면, 초승달이 뜨면, 달보다 별이 더 빛나는 날이면 깨어나지 않을까 하면서.
그때였다.
황제의 손가락이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가 살며시 눈을 떴다.
“어……?”
설마 이번에는 진짜인가.
천장을 멍하니 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은 숨죽이고 있던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에게 다다랐다.
“……어떻게 된 거지?”
낮게 잠긴 황제의 목소리가 힘겹게 나왔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느릿하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황제가 온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 사실에 에리스텔라는 안도와 환희를 느꼈지만, 동시에 극도로 긴장했다.
과연 돌아왔을까.
아니면 아무런 변화도 없는 걸까.
에리스텔라는 입술만 뗐다 닫았다 반복하면서 정작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도 입꼬리는 움찔거리기만 하며 좀처럼 미소를 그리지 못했다.
황제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펴볼 때마다 마음 한쪽에 존재하는 두려움이 그녀의 심장을 들쑤시며 후벼팠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꺼풀이 떨리는데 잘 떠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간신히 눈을 뜬 황제의 눈빛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흐리멍덩하게 탁한 눈빛이 아니라 맑고 총명한 눈동자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다 한곳에 머물렀다.
“에리스텔라?”
“…….”
“에리스텔라, 라라…… 내 동생이 맞네.”
황제가 먼저 에리스텔라를 향해 그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나도 오빠가 깨어나서 너무 좋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괴로웠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라라. 보고 싶었어.”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 옅게 느껴지는 떨림.
……훌쩍.
에리스텔라가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숨죽이던 울음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더니 곧이어 통곡으로 변했다.
으아아아아! 으어어엉!!!
시간이 지날수록 서러운 감정이 밀려오는지 에리스텔라는 더욱 크게 울었다.
“나도…… 나도 오빠가 보고 싶었어. 진짜…… 진짜 엄청 그리웠어.”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혼자 끌어안고 있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다신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어릴 적 그녀를 사랑하던 오빠의 따뜻한 시선과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포기했던 오빠가 지금 눈앞에 돌아와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사무쳐서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방금까지 예전 일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에리스텔라가 갑자기 도끼눈을 하고서 황제를 노려보며 말을 쏘아 냈다.
“나 엄청 속상했어. 오빠 원망도 많이 했는데…….”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꺼이꺼이 더욱 크게 울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인리시온과 황제는 에리스텔라의 울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벌을 서는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이렇게 품위를 내려놓고 우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좀 해 봐.”
“저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황제가 하인리시온에게 눈짓을 하며 재촉하자 하인리시온 역시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라라가 이렇게 우는 걸 처음 본단 말야. 그러니 뭐라도 좀 해 봐.”
“저라고 본 적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에리스텔라는 울기는커녕 그 반대인데.”
순간 울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하인리시온에게 닿았다.
하인리시온의 어깨가 보기 드물게 움츠러들며 한층 낮은 목소리로 황제에게 속삭였다.
“그런 거로 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폐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항명하는 건가!”
“여기서 항명을 논하시는 겁니까.”
에리스텔라의 눈치를 보며 논쟁을 벌이느라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가늘고 기다란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
에리스텔라가 손을 쭉 내밀고 있었다.
누구한테 내민 거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으니 에리스텔라가 황제를 향해 안 잡고 뭐 하냐는 듯이 내민 손을 마구 흔들었다.
하인리시온이 황제를 향해 얼른 잡으라고 마구 고갯짓을 했다.
“그, 그래.”
황제가 덥석 에리스텔라의 손을 맞잡았을 때였다. 에리스텔라가 그 손을 힘껏 끌어당겼다.
“어……?”
힘없이 끌려간 황제의 손이 어느새 에리스텔라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이렇게 달래줘야지. 우는 거 구경만 하고 뭐 하는 거야.”
“미안해. 오빠가 눈치가 없었네.”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린 황제가 남은 한 손으로 에리스텔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좀 더 부드럽게 살살.”
“그래. 살살.”
황제가 쩔쩔매며 에리스텔라의 등을 애지중지하며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에리스텔라의 눈물이 점점 잦아들 때까지.
훌쩍.
한껏 눈물을 쏟아붓고 나서야 마음이 좀 풀린 에리스텔라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원망은 진심이 아니었어.”
에리스텔라는 펑펑 울면서도 황제의 죄책감 가득한 무거운 얼굴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냥…… 서운해서. 오빠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고…….”
그래서 그냥 한 말이라고. 단순한 투정이니까 절대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그 모습은 과거 황제와 싸우고 난 후 사과하던 어린 에리스텔라의 모습 같았다.
“나는 네가 태어난 그날부터 너를 아끼고 좋아했어.”
“……이제 그만해도 돼.”
막상 듣고 나니 쑥스러워진 에리스텔라가 말했다.
“아냐. 조금만 더 할게.”
그렇게 황제의 토닥임은 에리스텔라가 이제 제발 그만, 이라고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황제는 에리스텔라에게 온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그녀를 달랬다.
“우리 라라를 혼자 남겨 두었네. 나쁜 오빠가.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할 거야.”
황제가 에리스텔라를 다섯 살 어린아이 달래듯 토닥일 때였다.
번쩍!
에리스텔라가 새끼손가락을 펼쳐 내밀었다.
“걸어.”
“어?”
“새끼손가락, 여기 걸어.”
“…….”
에리스텔라가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나랑 약속한 거야. 빼도 박도 못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에리스텔라의 심각한 표정에 황제가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럼 당연하지! 약속한다.”
황제가 새끼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에리스텔라의 새끼손가락에 착 감았다.
“좋아. 그럼 용서해 줄게.”
에리스텔라는 만족스럽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활짝 웃었다.
하인리시온은 남매의 애틋한 해후를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너무 무능했어.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에리스텔라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자 황제가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냐. 흑마법에 대해 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세뇌를 피하는 건 쉽지 않아.”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후회했다.
내가 먼저 조심하라고 경고해 줬더라면 이런 상황은 피했을지도 모르는데.
흑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세뇌는 워낙 교묘해서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위로를 들었음에도 황제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
“……?”
에리스텔라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인리시온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두 사람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해 줘야 할 말이 있어.”
“…….”
“라라. 너는 영리한 아이니까 이상하다는 건 알아차렸겠지?”
황제의 시선에 에리스텔라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