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황제가 흑마법에 당했다는 증거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됐다.
“걱정할 것 없어. 세뇌에서 벗어났으니 지금 남은 흔적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거야.”
하인리시온이 황제의 상태에 대해 침착하게 말했다.
“그동안 흑마법에 관해 연구한 기록을 전부 살펴봤는데, 그중 흑마법에 당한 상처를 치료하는 자료가 있었어.”
하인리시온은 그동안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보관 중이던 흑마법에 관한 서적은 물론이고 선대 대공이 연구한 기록까지 모두 찾아봤다.
“우선은 흑마법을 중화시키고 몸과 정신을 보호하면 될 거야. 지금만 잘 넘기면 돼.”
여우가 된 에리스텔라를 품에 안은 하인리시온은 그녀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꼈다.
공포에 젖은 에리스텔라를 진정시키고자 하인리시온은 주문을 걸 듯 몇 번이나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의 위로가 통한 것일까. 품속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둘은 내실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황제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의원이 봐야 할 거 같은데.”
과연 의원에게 이 모습을 보여도 될지 하인리시온이 고민할 때였다.
[괜찮을 거야. 황제의 전담의가 되면 특수한 마법을 거니까.]
황제의 전담의는 진료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누설할 수 없는 맹세를 하게 되는데, 이는 마법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결코 발설할 수 없었다.
그러니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은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곧바로 은밀하게 전담의를 데려왔다.
의원은 황제의 상태를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곤 가장 심각한 곳부터 처치를 시작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이에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다만, 몸이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약해진 게 문제였다. 또한 강한 충격을 받은 직후라 갑자기 상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앞으로 폐하께서 쾌차하실 때까지 이 상황을 최대한 숨겨야 해.]
황제의 상태를 확인하고 난 에리스텔라는 언제 떨었냐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녀에게선 황녀로서의 권위가 느껴졌다.
에리스텔라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직시했다.
[분명 조금 전 전투의 충격을 눈치챈 자들이 있을 거야.]
“주변이 울릴 정도였으니까. 적당한 이유가 필요하겠네.”
[내가 직접 나설 수 없으니까 부탁할게.]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설마 나를 걱정하는 거야?]
에리스텔라의 과장된 반응에 하인리시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비록 지금은 여우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황녀니까.
“그럼 다녀올게. 황궁 경비도 강화해야 하고 폐하의 공백을 숨겨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잘 다녀와.]
에리스텔라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하인리시온은 내실을 나서자마자 바로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했다. 일련의 사고로 위장하고, 현장을 수습한 기사단의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또한, 황제가 의식을 찾을 때까지 다른 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의심마저 지울 순 없으니 결국 황제가 깨어나야만 했다.
황제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위험한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에리스텔라가 잠도 자지 않고 지켜본 덕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물론이고 상황을 전해 들은 소니아와 샬롯이 와서 자신들이 대신 지켜볼 테니 잠시 쉬라고 권유했지만, “너도 지금 많이 지쳤어. 조금 쉬어 둬.”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을래.”
“어차피 바로 깨어나시지는 못할 거야. 잠깐 눈이라도 붙여.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꿈쩍도 하지 않고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리스텔라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태가 제일 마음 편해.”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초조해져만 갔다.
에리스텔라는 황제가 괜찮아지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황제가 흑마법에 당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을 알게 되면서 에리스텔라는 몇몇 순간들이 후회되었다.
분명 황제가 변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특히나, 자신을 대하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그 변화를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녀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고 있었으니까.
황제 역시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자고. 애써 담담한 척하려고 무시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의식을 잃은 황제의 얼굴에는 그녀가 알던 오빠의 흔적이 보였다. 그가 홀로 고통받은 시간의 흔적이 눈에 밟힐 때마다 에리스텔라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지금껏 죽은 듯 누워만 있었던 황제가 미약하지만 신음을 흘렸다. 놀란 에리스텔라가 상태를 자세히 살피는데…….
황제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어느새 정신이 돌아온 황제가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건 걱정스레 꼬리를 흔들며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여우 한 마리.
황제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의 갈라진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한동안 외면하던 이름을 불렀다.
“에리스텔라……?”
갑자기 이름이 불린 에리스텔라는 흠칫하며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봤다.
‘……나를 알아보는 거야?’
황제가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에리스텔라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경계하자 황제의 눈이 애달프게 휘어졌다.
그는 어딘지 애절한 눈빛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소중한 존재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황제의 애절한 시선을 마주한 에리스텔라는 마음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보고 싶었단다.”
‘…….’
황제가 힘겹게 말을 걸었지만, 에리스텔라는 휙 돌아서 하인리시온의 다리 뒤로 숨어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아서 황제의 얼굴이 슬프게 흐려졌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은 다리를 살짝 빼내어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먼저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 버렸다.
‘그냥 가만히 있어 줘.’
하인리시온을 붙잡고 있는 에리스텔라의 앞발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황제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에리스텔라가 불안해하며 하인리시온을 올려다봤다.
“다시 의식을 잃으신 거 같아.”
[…….]
다행인지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에리스텔라는 황제가 다시 일어날까 봐 긴장하면서 그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토록 깨어나길 바랐으면서 정작 황제가 자신을 알아보니 숨고 싶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거리감이 에리스텔라와 황제 사이에 벽을 만든 것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나 지금…… 여우인데.’
나를 알아봤던 건가?
에리스텔라의 걱정을 눈치챈 하인리시온이 황제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깨어나셨던 거 같아. 지금은 다시 잠드셨고.”
[…….]
아마 방금 그녀를 부른 것도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럼 나를 알아본 건 아니었겠지.
긴장한 나머지 파들파들 떨던 에리스텔라가 축 늘어졌다.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과연 온전히 정신을 차린 후에 자신을 보면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가워해 줬으면 좋겠는데.
“방금 잠깐이지만 깨어나긴 했으니 의원을 불러올게.”
대기 중이던 의원은 하인리시온의 부름에 곧바로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지금은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앞으로 며칠은 계속 잠에 빠져 있을 테지만 깨어나면 그때부터 회복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순조롭게 회복 중인 듯싶으니 곧 건강하게 일어날 거라는 말에 에리스텔라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말했다.
“깨어나자마자 내가 여우가 되는 걸 알면 또 충격받을 테니까. 당분간은 숨기는 게 나을 거 같아.”
황제가 잠시 눈을 떴을 때 여우인 자신의 모습을 본 게 내심 신경 쓰였다.
적어도 완전히 낫기 전까지는 되도록 놀라지 않도록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혹시라도 낮에 깨어나시면…… 나는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그건 상황을 보고 결정해도 될 거 같아.”
에리스텔라는 황제가 다시 깨어나면 여우가 아닌 본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때는 숨지 말고 환하게 웃어줘야지. 그리고 깨어나서 다행이라며 보고 싶었다고 말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