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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8)화 (78/123)
  • 78.

    손아귀에 힘을 주고 버텨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점점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제기랄. 이 난리라도 좀 잦아들면 좋을 텐데.

    결국, 하인리시온과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던 손끝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손끝에 힘을 주고 뻗어서 하인리시온의 손을 잡아 보려 하지만 눈앞이 보이지도 않아서 쉽지 않았다.

    멈추지 않을 기세로 울리던 시끄러운 마찰음과 폭풍이 점차 사그라들었을 때였다.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피는데…….

    “하인리시온?”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하인리시온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최면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이곳 어디에도 하인리시온은 없었다.

    어딜 돌아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것처럼.

    에리스텔라가 당황하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살피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름 회심의 한 방이었는데…… 역시 대공 전하는 대단하시네요.”

    흑마법사가 정체를 드러내 에리스텔라 앞에 나섰다.

    “마법 한번 요란하게 사용하네.”

    에리스텔라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실은 당황한 것을 숨기려 애써 침착한 척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흑마법사가 하인리시온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하인리시온은 무사할 거다. 공격의 진짜 목적은 우리 둘을 갈라놓는 거였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하인리시온을 걱정하는 것보다 눈앞에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우선이었다.

    “너였구나.”

    에리스텔라는 흑마법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미천한 저를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흑마법사가 에리스텔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했는데.’

    그녀는 황제의 가장 지척에 있는 존재였다. 그것도 매일 밤낮으로 세숫물을 가져오는 하녀.

    그게 황제에게 접근한 흑마법사의 정체였다.

    분명 존재하지만,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존재.

    그렇기에 마치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용케 알아차리셨네요.”

    “내 기억이니까.”

    감히 자신의 기억을 이용하다니 괘씸했다. 당하고 나니 굉장히 불쾌하고 찜찜했다.

    평소의 에리스텔라였다면 절대 걸리지 않았을 수작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위험한 존재가 황제의 곁에 있는데도 그동안 몰라봤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네가 어디서 우리를 음침하게 구경하고 있는지도 못 알아낼 줄 알았어?”

    “사실…… 네. 모를 거 같았습니다.”

    흑마법사가 난처한 척하더니 금세 돌변하며 에리스텔라를 놀리듯 뺀질거리는 미소를 짓고 지었다.

    정체가 발각되었는데도 그녀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네요.”

    “…….”

    “어째서 그분께서 황녀 전하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는지 알겠어요.”

    흑마법사는 계속해서 에리스텔라를 은근히 도발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굳어가는 모습을 즐기면서.

    “지금 몸 상태가 멀쩡하지 못한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눈치챈 흑마법사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도발했다.

    원래의 반도 되지 않는 마력으로 버티고 있다 보니 에리스텔라는 오랜 시간 무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힘을 썼으니 상대는 지금의 에리스텔라라면 상대할 만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그래?”

    스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에리스텔라의 얼굴은 싸늘했다.

    “너 겁이 없구나?”

    에리스텔라에게 있어 눈앞의 흑마법사는 그저 오만하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었다.

    경고는 에리스텔라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직접 보여 줘야지.

    에리스텔라가 순식간에 힘을 폭발시켜 정확히 상대를 노렸다.

    흑마법사가 막아 내는 것 같았지만 에리스텔라는 예상했다는 듯 재차 공격을 가했다.

    잡기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공격에 흑마법사가 밀려났다.

    결국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에리스텔라의 마력을 이기지 못한 흑마법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압박을 이겨 내고자 버둥거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압력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커, 커어억!”

    겨우 몸을 지탱하며 피를 흘리는 흑마법사를 향해 에리스텔라가 냉정하게 일갈했다.

    “착각하나 본데. 내가 원래 힘의 반의반도 못 쓴다고 해서 너 따위를 상대하지 못할 거 같아?”

    오만할 정도로 근거 있는 자신감. 그리고 지금 그녀가 폭발시킨 힘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흑마법사에게 가해지는 힘이 배가 되었다.

    압도적인 차이를 과시하듯 에리스텔라는 과감하게 자신의 마력을 뿜어냈다.

    “나야.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황녀 에리스텔라.”

    지금 에리스텔라가 아무리 약해져 있다고 해도 흑마법사의 힘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힘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체력이 소진되었다고 해서 에리스텔라를 상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건…… 그녀를 몰라도 한참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그놈이 너한테 조심하라고 한 건…….”

    에리스텔라가 나머지 힘을 끌어모았다. 이제 끝내겠다는 의지였다.

    “이런 의미야.”

    나한테 걸리는 순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알아서 조심해라.

    그 경고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남은 건…… 이거뿐이지.

    “그런데 감히 내 가족을 건드리다니. 각오는 했겠지.”

    에리스텔라는 흑마법사를 절대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커헉! 컥. 커억. 크으윽…….”

    흑마법사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었다. 손톱이 바닥에 박힐 정도의 고통이었으나 그녀의 눈빛은 공격당하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으윽…… 흐흐흐흣…….”

    오히려 에리스텔라를 향해 도발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저히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주인님께 목숨을 바치기로 했으니까. 지금 이렇게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어요.”

    흑마법사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 하지만 그 의지만으로 또렷하게 뻗어 나왔다.

    “저 하나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요. 어차피 우리의 계획은 완성될 테니까…….”

    “…….”

    “그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지.

    미련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의 숨이 멈췄다.

    조금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 붉게 충혈된 눈은 감기지 않은 채였다.

    “…….”

    그 모습은 몹시도 기괴하여 에리스텔라마저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폐하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에리스텔라가 그대로 돌아서 달렸다.

    “폐하!”

    흑마법사를 죽인다고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해제된 마법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목숨이 더 위험했다.

    게다가 황제는 마지막까지 흑마법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몸과 정신에 엄청난 무리가 갔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황제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

    에리스텔라가 도착했을 때 황제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의 흐릿한 시선을 반쯤 덮은 눈꺼풀이 에리스텔라를 향해 몇 번이나 깜박였다.

    하지만 그녀를 제대로 본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곧바로 황제의 눈꺼풀은 그대로 내려 앉아버렸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황제의 곁에는 하인리시온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괜찮을 거라고. 근거 따위는 하나도 없는 믿음이 들었다.

    “하인리시온, 폐하는?”

    “폐하의 자아가 전부 잠식될 뻔했어. 다행히 흑마법이 완전히 스며들지는 않았는지 폐하께서 아직 버티고 계셨고.”

    사실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줄 알았었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뇌를 걸었던 흑마법사를 해치운 덕분에 어떻게든 그를 구할 수 있었다.

    “내가 막기는 했지만 폐하께서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어.”

    예상외로 하인리시온이 나타나자 흑마법사들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을 뒤쫓고 싶었지만 당장은 황제의 상태가 중요했다.

    한눈에 보아도 상태가 나빠 보였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의지가 강하신 분이니 분명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래야지. 그래야만 해.”

    만약 황제가 잘못된다면 에리스텔라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들에게 복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 에리스텔라의 몸이 일순 빛났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여우 한 마리만이 남아 있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여우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지만 에리스텔라는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일단 폐하를 모시고 돌아가자.”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품 안에 넣고 황제를 업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고 있지?”

    하인리시온은 누구보다 황궁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에리스텔라에게 물었다.

    [저쪽으로 가면 벽으로 위장된 문이 있어. 거길 통하면 황제의 내실이 있으니까 얼른 몰래 들어가자.]

    황제의 몸에는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검붉은 반점이 곳곳에 있었고 손톱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지배당하는 동안 억눌려 있던 흑마법의 흔적이 세뇌가 풀리자마자 몸 곳곳에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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