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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7)화 (77/123)
  • 77.

    에리스텔라의 기억 속 세계의 시간이 또다시 흘렀다. 이번에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점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리고 과거에 그녀가 내려놓지 못하던 미련과 작별한 이상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분명 규칙이 있을 거야.”

    흑마법을 쓰면 같은 마력을 가지고도 보통의 마법보다 큰 효과를 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었다.

    흑마법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마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한이 존재할 것이다.

    “기억 속이라고 해도 한 공간을 유지해야 하니 마력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어.”

    최면을 이용해 만든 세계가 아니었다면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과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스스로 동화되지 않는 이상 무한정 이곳에 가둘 수는 없을 거야.”

    에리스텔라가 부모님을 보고 끝내 머무르겠다고 결심했다면 기억 속에 완전히 동화된 채로 갇혔을 것이다.

    처음엔 그게 흑마법사의 노림수라고도 생각했다.

    “대체 노리는 게 뭐지. 이곳에 우리를 가둬 놓고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더욱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역할도 한정적이었다.

    “날 흔드는 것도 결국 통하지 않았는데…… 왜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 유혹에 벗어난 후에도 기억 속 세계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혹시 우리를 공격하는 게 목적이 아닌 건가.”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굳어 갔다. 자신의 짐작이 틀리길 바라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목적이 아닌가 본데.”

    “그럼?”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 반대를 고려해 봐야 했다.

    하인리시온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발을 여기에 묶어 두려는 거지.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부 눈속임이고 농락이다.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면…….”

    의문을 가지던 에리스텔라의 말문이 막혔다.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에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랐다.

    “……폐하.”

    에리스텔라가 흑마법사를 쫓는 이유이기도 한 황제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더욱.

    “폐하는 지금…… 지켜 줄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지.”

    “…….”

    하인리시온 역시 상황의 시급함을 눈치챈 상태였다.

    에리스텔라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최면에서 벗어나고 흑마법사를 잡아도 황제를 구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었다. 이미 에리스텔라는 여러 번 늦었고 그때마다 뼈아픈 이별을 해야만 했었다.

    다시는 늦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안 늦었어. 일단 이 세계를 벗어나자.”

    하인리시온이 흔들리는 에리스텔라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로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해.”

    이 이상 늦는 건 정말 위험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최면에서 벗어나야 했다.

    혹시라도 눈앞의 환상을 부수면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둘은 마법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기억 속 세계는 부서지기는커녕 더욱 시간이 흘렀다.

    “계속 다른 기억이 펼쳐지네.”

    “이 세계를 깨는 방법이 대체 뭐지.”

    기억 속 상황을 지켜보다 보면 실마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에리스텔라의 기억 안에 답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봐야겠어.”

    지금 뭘 놓치고 있는지…….

    “최면에 걸리기 전에 숨어 있던 흑마법사를 상대하고 있었지. 그러다 여기에 갇혔는데…….”

    처음부터 상황을 하나씩 짚어 보는던 에리스텔라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시온.”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에리스텔라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여기 갇혀 있는 동안 그놈은 뭘 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휘둘리느라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최면에 걸리기 전까지는 한 공간에 있었는데.

    그럼 지금은?

    “최면에 빠져 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나?”

    아마도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어떤 방법으로?

    최면을 계속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흑마법도 무한정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최소한의 마력으로 많은 시간을 유지하려고 하겠지.”

    “마력을 최대한 적게 쓰려면…….”

    밖에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자신도 함께 최면 상태에 빠지면 마력을 최대한으로 아낄 수 있다.

    “그놈도 여기 있기라도 한 건가.”

    하인리시온이 무심코 내뱉었다. 하지만 내뱉고 나니 두 사람 모두 흘려넘길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나?”

    “우리가 여기서 본 사람은 전부 과거에 만난 적 있는 이들이었어.”

    어린 에리스텔라와 어린 하인리시온. 그리고 황궁의 시녀와 시종들.

    그 외에 이질적인 존재는 없었다.

    지금도 두 사람 앞에 지나가는 시녀들은 언제나 한결…….

    ‘어라?’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깜박깜박.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저 사람…….’

    최면에 빠져서 기억 속을 헤맨 지 어느새 한참이 지났다.

    그러다 보니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탈탈 털리고 말았지만, 그 대신 알 것 같았다.

    최면을 깨고 원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을.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뜩였다.

    “다른 사람이라니?”

    하인리시온이 의아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분명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에리스텔라가 기억하고 있는 황궁 사람들 뿐 어디에도 수상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확신에 차 말을 이었다.

    “여긴 내 기억 속이잖아.”

    모두 에리스텔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

    “물론 나도 황궁에 있는 시녀들을 일일이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만은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뭐가 다른 건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반복되고 기억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상한 점이 보였다.

    ‘저 사람 아까도 봤던 거 같은데? 근데 뭔가가…….’

    그녀의 기억 속에 반복해서 나오는 등장인물이 있었다.

    황궁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머물기에 특히 그랬다.

    당연히 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굴이 조금씩 변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혼자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한결같았다.

    마치 기억 속에 빠져 있는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처럼.

    “우리를 지켜보기 가장 좋으면서 사람들 속에 이질감 없이 섞여들 수 있는 위치라고 하면 시종이나 시녀지.”

    “……시종인가.”

    “그리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에리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리며 한 시종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방금 나랑 눈 마주쳤어.”

    그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시종들 틈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역시. 맞지?”

    “그러네. 이번엔 정확하게 맞혔어.”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동시에 흑마법사를 향해 공격을 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공격에 충격을 받은 하늘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설마 깨지는 건가?”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이곳에 있는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거였나 보네.”

    하인리시온의 예측이 맞았다.

    최면을 건 사람의 존재를 찾아내는 순간 기억 속 세계는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최면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와장창창.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박살 나면서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인리시온이 다급하게 에리스텔라를 감싸며 보호막을 만들었다.

    “조심해. 저건 진짜야.”

    세계가 깨지면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 전부 두 사람을 공격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기습적으로 에리스텔라를 노리며 공격해 왔다.

    에리스텔라가 반응하기도 전에 하인리시온이 먼저 막아서 두 사람이 입는 타격은 미미했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손을 꽉 잡았다.

    “뒤로 물러나!”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밀어내며 대신 공격을 막았다.

    에리스텔라도 나서서 도우려 하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잡고 있던 손이 점점 풀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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