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금세 의연한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돌아서며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비밀을 들켰을 때 두 가지 갈림길이 있지. 하나는 비밀을 아는 사람을 없애 버리는 거고…… 또 하나는 들은 사람이 비밀을 지켜 주는 거지.”
“…….”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아직은 두 분과 흑마법 사이에 얽힌 관계가 어떤 건지 찾아내지 못했어. 그때까지는 비밀 지켜 줄 수 있지?”
에리스텔라가 장난스레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 씩씩해서 얼핏 봐서는 정말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하인리시온의 눈에는 오히려 에리스텔라가 더욱 힘겹게 견디고 있는 게 보였다.
“나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같은 배를 타게 해 주다니 영광이네.”
그래서 하인리시온도 에리스텔라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야? 앞으로 나도 함께 찾으면 더 빨리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거면 충분해.”
에리스텔라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두 분은 내게도 특별한 분들이셨어. 게다가 내 부모님도 흑마법과 얽혀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하인리시온은 적극적으로 참견할 작정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너 혼자 움직이지 못하게 할 거야.”
앞으로는 에리스텔라 혼자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하인리시온의 다짐이자 통보였다.
에리스텔라의 기억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혼란은 있었지만, 그보다 에리스텔라가 혼자서 버텨 온 시간의 무게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인리시온의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자 에리스텔라가 태연하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 나는 잠깐이지만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았거든.”
그건 거짓 한 톨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 받을 사랑을 잠깐 동안 전부 다 받았으니까. 그 기억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어.”
그만큼 큰 사랑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동안 힘들지 않았다고.
에리스텔라는 담담하게 고백했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하인리시온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선대 황제와 황후의 죽음에 얽힌 진실 때문이 아니라 지난 에리스텔라의 시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 많은 시간을 오로지 혼자 버텨 오는 동안 얼마나 버거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엄청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된 거겠지.
그제야 그동안 에리스텔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런 무리수까지 두어가면서 아델라시아 선대 대공 부부의 죽음을 감추었는지까지도.
자신이 이미 겪어 본 일이기에 하인리시온이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숨기려 했던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던 거다.
그렇기에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받아들이려 한 거겠지.
‘그렇다고 모두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시간들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잖아.’
여우로 변한 에리스텔라와 지내 보니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태연한 척을 잘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혼자 괜찮은 척 견뎌 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너무하잖아.
에리스텔라의 주변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는가.
그리고 그중에는 하인리시온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역시 그녀가 말한 운명대로 에리스텔라를 오해하고 증오하고 배척했으니까.
그녀의 운명을 입증해 버리는 꼴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증명해 보여야겠지.’
세상에 그런 운명이 어딨어. 만약 있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걸 앞으로 평생에 걸쳐 에리스텔라에게 보여 주겠노라고 하인리시온은 이 순간 결심했다.
하인리시온은 다짐을 입 밖으로 꺼내 맹세하지 않았다. 이건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하는 문제였다.
지금의 에리스텔라는 무슨 말을 해도 완전히 믿지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이번엔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출렁이는 공기 방울처럼 주변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서로를 지탱해 주며 버텼다. 어느새 또 다른 기억 속에 다다라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기억이지.
“분명 아홉 살 때 내 기억을 보여 주는 최면은 이미 깨졌어.”
하지만 눈앞의 세계는 깨지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에서 벗어나더라도 최면 속 세계에서는 벗어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최면은 일단 내 의지에 영향을 받을 텐데. 내가 완전히 끊어 냈는데도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건…… 이 세계를 이루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거야.”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
“그전에 지금 이곳의 네가 몇 살인지부터 확인해 보자.”
그러려면 과거의 에리스텔라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두 사람이 찾으러 가기 전에 먼저 어린 그녀가 나타났다.
다만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 더 성장한 모습이었다.
“저때가 몇 살이지? 열넷? 열다섯?”
에리스텔라가 어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헷갈려 할 때였다.
“열다섯이야.”
에리스텔라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하인리시온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나? 별로 기억나는 일이 없는데.”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인상적인 사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전 시간들을 고려했을 때, 뭔가 특정되는 사건이 있을 거야. 한번 잘 생각해 봐.”
지금 이 세계를 헤쳐 나가기 위해선 에리스텔라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쯤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폐하와 관계가 틀어진 거뿐인데.”
에리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분명, 열다섯이 되던 여름부터 황제와 그녀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었다.
현 황제는 조금씩 에리스텔라의 행동에 지쳐 가는 듯 쌀쌀해졌고 이전까지는 함께 보냈던 식사나 여가 시간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예정되어 있던 일이니까. 게다가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고.”
에리스텔라가 중얼거리며 부정하자 하인리시온이 한 가지 의문을 꺼냈다.
“아니면 네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지.”
“내 기억인데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봤자…….”
반박하던 에리스텔라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눈앞에 황제가 나타났다. 어린 에리스텔라와 지금보다는 앳된 모습의 황제.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 일인 건가.
“아무래도…… 폐하가 처음으로 세뇌에 걸렸던 시기인 거 같아.”
그리고 상황을 지켜볼수록 점점 확신이 되었다.
마치 에리스텔라를 괴롭게 하기 위한 기억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의 눈꺼풀이 분노로 떨렸다.
저 당시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때부터 황제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때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었는데.
에리스텔라는 황제의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고, 이전 생에서도 황제는 에리스텔라를 배척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기억 속 자신의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럼 폐하가…… 달라졌던 건 내가 싫어서가 아니었던 걸까.
혹시 그게 아니라 흑마법사의 세뇌 때문에 진심과는 상관없이 변했던 걸까.
에리스텔라의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면…… 너무 이기적인 걸까.
아주 작은 희망과 함께 황제가 세뇌에 걸리기 시작한 시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는 최면으로 자신의 기억을 보여 주는 의도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기억들을 보면서 그녀는 계속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변하고 흔들리게 만들었다. 마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유도하는 것처럼.
그러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야 자신들을 기억 속 세계에 가둔 흑마법사의 의도를 깰 수 있었다.
‘절대로 폐하를 너희들 뜻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에리스텔라의 머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