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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5)화 (75/123)
  • 75.

    “라라…….”

    그 순간 에리스텔라는 자신을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가 이토록 두렵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내가 찾아낼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서 더 간절하게 황후의 옷깃을 꽉 붙든 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아이의 작은 몸이 떨리고 있었다.

    황후가 딸의 눈가에 가득한 눈물을 닦아 주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라. 이제 시간이 없단다.”

    “…….”

    “엄마 아빠가 미안해. 아직은 어린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서.”

    “괜찮을 거예요. 저 강하잖아요. 지금은 어리지만 그래도…….”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황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딸을 꽉 끌어안았다.

    “라라. 지금의 너는 아직 어리지만 나중엔 분명 제국을 지탱하는 사람이 되겠지. 하지만 그보다 네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란단다.”

    “…….”

    “못난 어미라도 우리 딸을 위해 그 정도는 해야지. 다만…… 엄마랑 아빠가 마지막 일을 끝내지 못한다면…….”

    황후가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자신의 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아닌 제국의 황후로서 아직은 작기만 한 어린 딸을 향해 무거운 부탁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우리 라라한테 다음을 맡겨도 될까?”

    에리스텔라는 눈물을 쏟으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것뿐이라는 무력감을 느끼면서.

    결국, 에리스텔라는 부모님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변하는 건 없어.”

    이제 더는 보이지 않는데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에리스텔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이 순간이 계기였다.

    그녀가 이전 삶의 기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그리고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리며 만족하기로 한 것도.

    “제 인생은 바뀌지 않겠지만 제 모든 걸 걸어서 단 하나만은 바꿀 거예요. 두 분의 명예를 지킬게요. 그리고 제국에 방해가 되는 존재를 없앨 거예요.”

    그녀의 공허하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그날의 다짐은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전부가 되었다.

    ***

    “…….”

    과거의 일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에리스텔라는 어렸을 적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전부 알아차렸다.

    결국엔 전부 에리스텔라의 과거였다.

    그 당시 전생을 모두 떠올린 어린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앞에 닥친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오직 한 가지만을 바랐다.

    부모님을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부모님이 완전히 떠났을 때, 에리스텔라는 앞으로의 인생을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이지 않을까. 뭔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두 분을 쫓아가서 앞으로 닥칠 일을 막아 낼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잖아.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누를 수 없는 욕구가 일었다.

    그때였다.

    묘하게 흐르는 상황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돌아가신 건 사고가 아니었어?”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돌아봤을 때였다.

    쿵.

    순간 심장이 바닥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에리스텔라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어린 자신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스텔라.”

    “…….”

    하인리시온은 문득 에리스텔라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를 다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도.

    “에리스텔라. 정신 차려. 그리고 여길 봐.”

    하인리시온이 강제로 에리스텔라의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눈앞의 장면에서 단 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터질 듯한 무언가를 꾹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꿀 수 없어. 바꿔서도 안 되고. 그게 함정인 거 너도 눈치채고 있잖아.”

    “…….”

    “만약 여기서 네가 뭔가를 바꿔 버린다면 여기에 갇히게 될 거야. 그럼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 네가 여기에 갇히면 다른 사람들은?”

    “누구?”

    에리스텔라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저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원래 있던 곳에서 나는 어차피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데.”

    에리스텔라의 허무한 대답에 하인리시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 있잖아.”

    “…….”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그게 에리스텔라의 마음을 붙잡았다.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현실에서 네가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 정말 단 한 명도 없어?”

    하인리시온은 답답함을 못 이기고 그녀를 재촉하듯 반문했다.

    “소니아는?”

    “…….”

    “샬롯은?”

    “…….”

    그리고 나는.

    하인리시온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래도 그의 말이 영향을 주었는지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에리스텔라.”

    “……알아. 바꿀 수 없다는 거. 바꿔서도 안 되고.”

    방금까지만 해도 당장 사라질 것만 같았던 에리스텔라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와 하인리시온을 또렷이 응시했다. 다만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없었다. 체념한 듯 어딘가 서글픈 어조로 에리스텔라가 말했다.

    “…….”

    “나는 이번에도 두 분이 사지로 가는 걸 지켜만 볼 거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뿐이니까.”

    이곳은 현실이 아니고. 에리스텔라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최면에 걸린 세계를 벗어날 거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에리스텔라는 지금 또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내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하인리시온에게 그녀가 지금껏 숨겨 온 이야기를 고백할지에 대해서.

    에리스텔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온. 고백할 게 있어.”

    사실은 절대로 고백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사고가 아니었어.”

    황제와 황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제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시찰을 나갔던 황제와 황후가 머무는 저택에 예기치 못한 화재가 일어났다.

    게다가 악조건인 날씨 때문에 불길은 순식간에 저택을 뒤엎었다.

    갑작스러운 화재였다. 그 때문에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위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두 분이 돌아가신 건 흑마법과 연관이 있거든.”

    “…….”

    “……두 분은 사고로 죽기 위해 떠나신 거야.”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네.’

    에리스텔라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야.”

    그녀도 모든 걸 정확히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의 죽음에 흑마법이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 것인지.

    공격당한 것인지. 아니면 흑마법과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말할 수 없었다.

    “이건 폐하도 모르는 사실이야.”

    오로지 이 제국에서 단 한 사람. 에리스텔라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에리스텔라는 굳게 믿었다. 결코, 두 분이 흑마법과 손을 잡았을 리 없다고.

    하지만 온전한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 채로 일부만 세상에 드러났을 때.

    과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 줄까.

    아니, 믿어 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 두 분의 명예에 흠이 남지 않도록. 두 분이 살아온 행적과 죽음이 처참하게 짓밟히지 않도록 에리스텔라는 진실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때부터였다.

    에리스텔라가 흑마법을 쫓기 시작한 것이.

    “나는 마지막까지 내 가족의 명예를 지킬 거야.”

    에리스텔라가 이미 두 사람이 떠나고 텅 빈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이렇게 성장한 모습도 보실 수 있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게 너무 아쉬워요.

    엄마. 아빠. 두 분의 딸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엄마랑 아빠의 딸로서 제국의 모든 것들을 지키고 싶을 만큼요.

    저는 여기 더 있으면 안 돼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두 사람에게 닿지 않을 인사였지만, 에리스텔라는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예전에는 너무 어려 슬퍼만 하느라 미처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정말 많이 그리웠어요. 매일매일 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엄마 아빠의 딸이어서 행복했어요. 앞으로는 함께한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웃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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