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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3)화 (73/123)

73.

에리스텔라는 선대 황제와 황후를 보는 순간 최면 속 이 세계에서 진짜 중요한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때쯤에 선대 황제 황후 폐하의 사고가 있지 않았어?”

하인리시온 역시 시기를 짐작했다.

선대 황제와 황후는 급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지 않아?”

다만, 지금 바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에리스텔라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건 선대 황제와 황후의 죽음일 텐데.

왜 그때까지 시간적 여유를 둔 걸까.

거기까지 생각에 미친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가지 일이 떠올랐다.

***

낮잠을 자다가 부스스 깨어난 어린 에리스텔라는 어딘지 이상함을 느꼈다.

“……꿈이었나?”

잠에서 깬 아이는 한참 동안 멍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아니, 내가 이미 겪었던 일 같은데…….”

머릿속에 너무 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생겨났다. 그걸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 바로 그녀의 운명에 대해 모든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이었으니까.

어떤 극적이 사건이나 계기 따위는 없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기억이 밀려왔다.

어느 정도 잠을 깬 에리스텔라가 침대에서 내려와 터덜터덜 걸어 황후궁까지 갔다.

그러더니 포옥.

황후에게 안긴 채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말했다.

“엄마. 시찰 가지 말아요.”

“갑자기?”

“응.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요. 시찰 가면 몇 달은 못 보잖아요.”

“다녀와서 실컷 보면 되지.”

“……그냥 올해만 안 가면 안 돼요? 네?”

어린 황녀는 황후에게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우리 라라가 이렇게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닌데. 왜 그럴까?”

황후가 그런 딸을 마냥 나무라지 않고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이는 열심히 눈동자와 머리를 굴리며 이유를 찾았다.

“저 몇 달 사이에 키가 훌쩍 큰 거 있죠? 분명 앞으로 몇 달 사이에 더 클 거예요. 게다가 지금 마력 훈련도 중요한 단계이고…….”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두 사람이 시찰을 떠나면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되니까.

“엄마랑 아빠가 지금 제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제 옆에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어떻게든 황제와 황후를 죽음으로 내모는 시찰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앞으로 불행해질 자신의 운명보다는 당장 눈앞에 죽음이 닥친 황제와 황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라라가 그렇게 원하면 이번에는…… 그냥 라라 곁에 있을까?”

“정말요?”

황후의 말에 에리스텔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도 우리 라라가 이렇게까지 부탁한 적 없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대신 올해만이야. 알겠지?”

“좋아요!”

에리스텔라가 황후를 꽉 끌어안았을 때였다.

“라라. 아빠는?”

바쁜 와중에도 잠시 짬을 내서 들른 황제가 짐짓 섭섭한 척 팔을 뻗었다. 아이는 그대로 달려가 단숨에 황제의 품에 안겼다.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에리스텔라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이제 시찰을 가는 날까지만 방심하지 말고 부모님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그래서 평소에는 꾀를 부려 도망치던 정원 만찬회에도 참여했다.

황궁으로 어린 영식과 영애들을 초대해 교류하는 자리였다.

물론,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몰래 빠져나왔지만.

“심심한데 하인리시온은 왜 안 오는 거야?”

몸이 약한 하인리시온은 하필 감기에 걸려 오지 못했다. 그걸 알면서도 에리스텔라가 투덜거리며 혼자서 후원을 돌아다녔다.

그녀 나름 서투르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에리스텔라의 시선에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꼬맹이가 잡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하얀 피부에 어쩐지 병약해 보이기도 하는 순진한 얼굴을 가진 어린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너 누구야?”

“저는 에밋 시안느라고 합니다. 작은 영지 출신이지만 잠시 수도에 왔다가 영광스럽게도 초대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수도에 머무르고 있는 영식들을 전부 초대했으니까. 그럼 재밌게 보내!”

에리스텔라가 금방 관심을 끄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황녀 전하.”

“응?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전하께서는 저와 비슷하시네요.”

“……?”

“제가 저와 비슷한 사람을 정말 잘 알아보거든요.”

“응. 그런 말 하는 사람 많아. 그리고 여기는 황녀궁 후원이야. 내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지. 잘 가.”

에리스텔라는 그 말을 유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녀에게 친밀감을 보이기 위해 애써 공통점을 찾아 말하는 애들은 많았으니까.

이번에도 에밋이라는 아이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는 가뿐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하인리시온을 만나서 놀았다.

***

‘어……? 왜 눈에 익지?’

기억 속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지켜보면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때 후원에서 누군가를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고…….

‘맞다. 저 애를 만난 적 있었지.’

어린 자신을 지켜보던 에리스텔라는 에밋이라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그대로 잊고 지냈었는데…… 왜 갑자기 그놈이 했던 말이 떠오르지.

프루투 지역에서 놈은 에리스텔라에게 당해 부상을 입었었다. 그때, 시간을 벌기 위해 에리스텔라를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놈이 말했었다.

“전하. 저는 저주받은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답니다.”

“그래서?”

놈은 흑마법사 중에서도 강력한 저주를 구사했기에 그 주장에는 신빙성이 있었지만 에리스텔라는 일부러 무시했다.

하지만 놈은 조금도 기죽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전하 역시 저주를 가지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

“참 얄궂은 운명이군요.”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보란 듯이 그녀는 부러 놈의 부상을 노려 공격했다.

상처 때문에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놈이 피를 닦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공격을 퍼부어도 절대 입을 다물지 않겠다는 끈질긴 의지였다.

결국,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놈의 재수 없는 입이 또다시 열렸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이라니요. 설마 제가 황녀 전하를 동정하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누가 동정 따위 필요하대?”

에리스텔라가 매섭게 뿌리치며 무시했다.

아주 살짝 놀라기는 했다. 설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저주를 그가 눈치챌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따위 저주쯤 무시하며 살아온 지 오래였다.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저주를 들먹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할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놈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황녀 전하. 그 운명의 저주는 누가 걸었는지 아십니까?”

“……관심 꺼.”

사실은 몰랐다.

저주를 건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저주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저주를 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사람을 찾아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까.

“역시 혹시나 하는 희망이 생기죠?”

에리스텔라가 단숨에 표정을 바꿨다. 약간의 틈만 내보여도 저들은 득달같이 물어뜯을 테니까.

회상에서 벗어난 에리스텔라는 문득 의아해졌다.

‘왜 두 사람이 겹쳐 보이지?’

저 에밋이라는 어린아이와 그놈의 얼굴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하다못해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도 다른데…… 왜 께름칙한 기분이 들지.

아니, 깊이 생각하지 말자. 어릴 적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서 그런 거겠지.

에리스텔라가 찝찝한 기분을 애써 지워 냈다.

***

‘내일은 하루 종일 엄마 옆에 붙어 있어야지.’

어린 에리스텔라가 당찬 계획을 세우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에 자리를 잡자마자 금방 눈이 잠기며 꿈나라로 빠져들 때였다.

‘어디서 마력을 이렇게 쓰는 거지?’

뭔가를 느낀 에리스텔라가 졸린 눈을 끔벅이며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방금 황궁 안에서 이상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황궁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와는 다른 뭔가가 순간적으로 폭발하며 생기는 마력 같았다.

마력에 민감한 에리스텔라이기에 느낄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황궁 안에서 이 정도로 마력을 쓰는 일은 흔치 않았다.

‘뭘 터트리는 거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에리스텔라는 마력이 느껴지는 위치를 살폈다.

‘게다가 저쪽은…… 아빠랑 엄마가 있는 곳이잖아?’

에리스텔라는 당장 황궁 기사단에 알리려고 했다.

잠깐만.

“분명 두 분이 떠나기 전에 황궁에 사고가 있었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분명히 건물이 무너지고 황제와 황후가 근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어째서 황제와 황후가 쓰러졌는지, 건물은 왜 무너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것투성이였지만 그다음에 있었던 일이 더욱 충격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해 보자.’

그렇게 에리스텔라는 마력이 느껴지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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