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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2)화 (72/123)
  • 72.

    ***

    에리스텔라는 태풍이 몰아치고 간 잔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너는 착각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에리스텔라의 눈은 초점이 흐리멍덩하고 얼굴은 초췌했다. 그녀는 힘없이 넋 빠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그건…… 멋모르던 시절이었어.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한때의 실수 같은 거니까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인리시온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질 뿐이었다.

    “어쨌거나 첫사랑이 나라는 건 사실이잖아.”

    “…….”

    그 한마디에 에리스텔라는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 말을 부정한다고 해도 통할 리 없으니까. 오히려 처절한 발악으로 보이기만 할 뿐.

    “그때 소니아와 샬롯이 얘기한 사람이 나였던 거였어.”

    우릴 여기에 가둔 놈한테 고마운 일도 생기네.

    하인리시온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흑마법사를 향한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절대 가만 안 둬.

    “근데 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 거야?”

    소니아와 샬롯이 한 이야기를 떠올린 하인리시온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에리스텔라가 실종되기 전까지 둘은 약혼 관계였다.

    만약 그녀에게 아무 일 없었더라면 결혼까지도 이어졌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그 말은 분명 이상했다.

    그러자 에리스텔라가 오히려 황당하다는 시선을 하고서 툭 내뱉었다.

    “너 나 싫어했잖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원망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걸 완전히 깜박하고 있었다.

    “그건…….”

    하인리시온이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에리스텔라가 갑자기 발끈하며 외쳤다.

    “저게 다 어릴 때 일이라는 게 중요하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를 따져.”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선을 그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저 에리스텔라는 그 모든 것이 과거형이 되기를 바랄 분이었다.

    그리고 사실…… 에리스텔라는 이미 지난 삶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하인리시온은 결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의 약혼 기간은 그저 정당하게 파혼하기 위한 명분을 찾는 시간에 불과했다.

    지금의 하인리시온은 아직 모르는 이야기.

    이번에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자마자 하인리시온과 파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적어도 지난번처럼 나를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면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과의 관계에 만족했다.

    지금 이 정도도 놀라운 변화라고.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딱 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시 저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과 같은 모습은 바라지도 않았다.

    에리스텔라가 후원 구석에 숨어 있는 어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하! 황녀 전하 어디 계세요?”

    시녀들이 황녀를 찾아 헤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에리스텔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로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나.”

    숨어 있는 에리스텔라의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놀라기는커녕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엄마!”

    에리스텔라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황후가 뒤에서 상체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에리스텔라가 전력으로 달려 황후의 품에 폭 안겼다.

    “우리 딸이 또 혼자 도망쳤다길래 엄마가 찾으러 왔지.”

    “어? 혼자 아냐! 나 시온이랑 같이 왔어!”

    “시온?”

    황후가 돌아볼 때였다.

    “나…… 시온이라고 불러주는 거야?”

    어린 하인리시온이 꾸물꾸물 나서며 감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굵은 눈물 한 방울 톡 떨어트릴 기세였다.

    “별 이유 없어. 그냥 부르기 편하잖아.”

    에리스텔라가 퉁명스럽게 딴청을 부리며 말했지만, 황후의 시선에는 딸의 볼 끝이 발그레해진 게 보였다.

    “어머. 하인리시온이랑 친해진 거야?”

    “네! 저도 곧 라라라고 부를 거예요!”

    “우리 라라한테 드디어 친구가 생긴 건가?”

    황후가 감격하며 손뼉을 치며 기뻐했을 때였다.

    “드디어라니! 꼭 친구가 없는 거 같잖아!”

    “어머. 아니었어?”

    황후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에게 안겨 있던 에리스텔라가 욱했다.

    “엄마!”

    황후의 짓궂은 말에 어린 에리스텔라가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돌려 현재의 에리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갑자기 날 왜 그렇게 봐?”

    그녀는 괜스레 뺨을 긁적이며 눈을 흘겼다. 하인리시온은 어린 에리스텔라와 지금의 에리스텔라를 겹쳐 보고 있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네가 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어릴 때랑 똑같은 거 같아서.”

    “……그거 욕이지?”

    에리스텔라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 분명하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욕이었다.

    “한결같다는 거지.”

    장난기 가득한 대답에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갔을 때였다.

    다시 과거의 에리스텔라에게로 시선을 돌린 하인리시온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변하지 않았는데 단지 내가 너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아보게 되네.”

    그간 에리스텔라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던 시간들이 자신의 탓인지도 모른다고.

    에리스텔라를 향한 반성이 담긴 진심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그건 하인리시온이 반성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마찬가지야.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무시했으니까.”

    그로 인해 더 많은 오해를 하게 만들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그로 인한 마음의 짐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계속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돌아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선 여전히 에리스텔라의 기억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자그마한 딸이 약올라 하는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황후는 잠시 웃었다. 그리곤 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하. 오늘도 재밌게 놀았어? 그만 저녁 먹으러 갈까?”

    “응!”

    언제 불퉁해졌냐는 듯 어린 에리스텔라는 황후에게 안겨서 떨어질 줄 몰랐다.

    “라라. 엄마한테 안겨서 갈 거야?”

    황후가 옆에 오도카니 서 있는 하인리시온을 눈짓하면서 물었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린 에리스텔라가 잠시 고민하다가 황후의 품에서 쏙 떨어졌다.

    “걸어갈 거야!”

    “우리 라라도 많이 컸네.”

    “당연하지. 헤헤헤.”

    신이 난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과 함께 나란히 걸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황제가 황태자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다들 여기 있었구나.”

    “오늘은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정원에서 식사를 할까.”

    “좋아!”

    두 아이들은 진심으로 좋다는 듯 기대에 찬 얼굴로 방방 뛰어다녔다.

    “…….”

    지금도 생생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차지한 게 바로 가족이었다.

    너무나 좋았다. 세상에 부모님과 오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

    에리스텔라에게 가장 큰 축복은 풍요로운 제국의 황녀로 태어난 것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이자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두 분이 살아 있는 시기였구나.’

    이곳에서는 어린 에리스텔라가 황제와 황후와 함께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

    그리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시간.

    그녀의 얼굴에 어느새 애틋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어요.’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지금은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좀 더 담고 싶었다.

    따뜻했던 이 순간을 앞으로 더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에리스텔라가 두 사람을 눈에 차곡차곡 담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 말하기 미안하지만.”

    “아냐. 나도 알고 있어.”

    에리스텔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끔 최면을 건 흑마법사의 의도에는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결단코 에리스텔라의 첫사랑을 알리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두 사람을 이곳에 가둔 자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을 터.

    그러니 진짜 의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

    앞으로 그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두 사람에게 좋지 않을 거라는 사실 역시도.

    그러니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하지만 아무리 알고 있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에리스텔라의 시선 끝에 자꾸만 멀어지는 다섯 사람의 뒷모습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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