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야. 너 딱 멈춰. 그만! 동작 금지!
에리스텔라가 미친 듯이 외쳤지만 그런다고 전해질 리 없었다.
가능만 한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달려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사태를 어쩌면 좋으냐고!
에리스텔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게 나았을까.
하필이면 생각나 버렸다.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절대로 안 된다.
반대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하인리시온은 태평했다.
에리스텔라만 초조한 마음에 다급해질 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에리스텔라가 어떻게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꿔 보려고 시도했다.
남몰래 과거의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 보지만.
‘될 턱이 없지.’
아니면 혹시 지형지물에는 마법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주변에 있는 나무나 풀을 이용해 보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 진짜…… 이대로 그냥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거야?’
에리스텔라는 허탈한 눈으로 멍하니 앞을 봤다.
이곳에서는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과거의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에리스텔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라면 그 최악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 거다.
‘대체 어째서……!’
왜 하필 이 순간인 거냐고.
***
그날, 어린 하인리시온은 끝내 에리스텔라를 따라잡는 데 실패했다.
에리스텔라가 슬쩍 속도를 조절하며 기다려 주기도 했지만 예전의 하인리시온에게는 그 정도의 체력조차 없었다.
“다시 봐도 어릴 때 참 형편없었어.”
“네가 무식할 정도로 힘이 넘쳐났던 거야.”
현재 하인리시온 실력의 반 할은 어린 시절 에리스텔라를 쫓아다니면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물론, 지금은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꼬마 하인리시온이 시무룩한 얼굴로 훌쩍거렸다.
하인리시온은 당장이라도 과거의 자신에게 가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냐고 다그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그럼…… 라라라고 못 불러?”
아이의 작은 어깨가 아쉬움에 축 늘어졌다.
“왜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그렇게 부르는 게 부러워서. 나도 따라 부르고 싶어.”
어린 하인리시온이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말했다.
귀를 빨갛게 물들이던 하인리시온이 맞은편의 에리스텔라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너 귀가 빨개졌어.”
어린 황녀 역시 쑥스러움에 귀가 빨개진 상태였다.
하인리시온뿐만 아니라 과거의 자신까지 귀가 빨개지자 에리스텔라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쑥스러움을 숨긴 어린 에리스텔라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꿈질거리는 하인리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한참을 있다가 ‘어휴.’ 어린애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하인리시온의 옆에 털썩 앉았다.
“다음에 따라잡으면 되잖아. 그때는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
“그럼 그때 불러. 라라…… 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하인리시온이 기죽을 것을 염려한 어린 에리스텔라 나름의 위로였다.
그리고 사실…….
“그 애칭 나한테 엄청 특별한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특별하게 취급해 달라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고.
에리스텔라는 과거의 자신이 새침하게 뱉는 말 뒤에 숨긴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진짜야.”
‘라라’라고 부른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걸 순진하기만 하고 달리기도 느린 저 시절의 하인리시온은 모르겠지. 그러면서 부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겠지.
어린 에리스텔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을 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하인리시온이 ‘라라’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심장에 바람이 인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러니 차마 단호하게 자를 수가 없어 충동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걸 네가 알 리 없지.”
사실 과거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결국 자신을 따라잡지 못해 내심 아쉽다고 생각했었다. 동시에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 절대 하인리시온에게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결심까지 했다.
그래도…….
“나 너 안 싫어해.”
과거의 자신이 혼자서 읊조리는 말을 듣는 에리스텔라는 괴로워서 온몸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아직도 여기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인리시온이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지금 심각한 거 안 보여? 근데 왜 즐거워 보이지?
에리스텔라의 분노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튀었지만 그렇다고 소리 내어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곳 상황을 어찌할 수 없으면 벗어나기라도 하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인리시온에게 제안했다.
“여기서 둘만 지켜봐 봤자 별로 건질 것도 없는데 다른 곳을 살펴보는 게 어때?”
하지만 이미 에리스텔라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하인리시온에게 그런 얕은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지켜보고 싶거든.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한데?”
“……궁금해할 거 없어. 별거 없는데. 뭐.”
“그럼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없다며?”
“…….”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았다. 결국, 에리스텔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는데, 마치 심판당하는 순간을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역시나. 제발 입을 다물었으면 했지만, 거리낄 게 없는 어린 황녀님은 바로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내 놀이 친구 중에서 네가 제일 맘에 들어.”
“…….”
“……좀 귀엽기도 하고.”
어린 에리스텔라가 쑥스러운 듯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쑥쑥 자라서 잘 크면 그때는 좀 더 좋아해 줄게.”
“…….”
“왜 대답이 없어?”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낮춰 얼굴을 확인할 때였다.
그 순간, 하인리시온의 작은 머리가 스르르 에리스텔라의 어깨로 떨어졌다.
“뭐야. 잠들었어?”
분명 눈이 감겨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들렸다.
“기회 놓친 건 너다.”
툴툴거리면서도 에리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하인리시온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잡아 주었다.
“나중에는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어린 황녀는 머뭇거리며 놀이 친구가 잠들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다가, 손을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기도 하고 코 밑으로 손가락도 슬쩍 가져가 대기도 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들었다고 확신한 에리스텔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조금 좋은 거 같아.”
분명 빼도 박도 못하는 고백이었다.
역시나.
꼭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진다니까. 에리스텔라가 끔찍하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하인리시온의 입꼬리가 아주 멋들어지게 올라가는 모습을.
아냐! 저건 첫사랑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어린애가 친구한테 말하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라고!
에리스텔라가 해명을 위해 외쳤다.
그렇다고 별로 통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 인정한다.
이때부터 에리스텔라의 첫사랑은 단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고백이 그런 의미를 담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저 하인리시온이 그동안 만났던 놀이 친구와는 다르게 좀 더 편하고 좋다는 정도였다. 다만,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하인리시온을 쭉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 시작점을, 그것도 내가 내 입으로 고백하는 걸 이렇게 들키는 날이 올 줄이야.
‘차라리 꿈이라고 해 줘. 끔찍한 악몽이라고 하면 다 견딜 수 있어…….’
하지만 그럴 리 없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이라도 당장…… 당황하던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뭐야? 왜 갑자기 공격을 하려고 해?”
하인리시온이 방금 자신을 노리던 에리스텔라의 팔을 붙잡았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치켜뜨며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둘 중 한 명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하니까.”
“……그게 나고?”
에리스텔라의 진지하고 뻔뻔한 대답에 하인리시온이 황당해했지만.
“응.”
에리스텔라는 진심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둘이 함께 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으니 하인리시온을 쓰러트리는 수밖에.
에리스텔라가 어떻게든 하인리시온을 쓰러트리기 위해 비장해졌을 때였다.
“그럼 안 되지.”
그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좀 더 지켜봐야지.”
하인리시온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에리스텔라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 이어졌다.
차라리 내 귀를 막자 싶어서 양손으로 막았다가 불안한 마음에 슬쩍 손을 떼 확인한 순간.
으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