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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70)화 (70/123)
  • 70.

    “저기서 누가 달려오고 있어.”

    하인리시온이 정원에 나 있는 길을 보며 말했다.

    “일단 숨자.”

    상대방이 누구일지 모르니 확인이 먼저였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급하게 몸을 숨기고 상대를 지켜보는데.

    ‘저 아이들은……?’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소녀의 뒤를 쫓던 소년은 금세 콰당 넘어졌다.

    “어휴. 또 넘어졌어?”

    짧은 팔로 팔짱을 낀 소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심해했다.

    “그러게 쫓아오지 말라 그랬지?”

    자꾸만 쫓아오는 소년이 성가시다는 듯 이내 소녀는 소년을 버려둔 채 더 빠르게 달려갔다.

    “같이 가……!”

    소년은 흙이 잔뜩 묻은 채로 일어나 다시 열심히 따라 달렸다.

    그래 봐야 느리고 어설픈 달음박질에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뿐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었다.

    언제인지 생각났다.

    “네가 나 엄청 쫓아다닐 때네.”

    넘어진 아이를 보며 에리스텔라가 킥킥 웃었다.

    “뭐, 그럴 때가 있었지.”

    하인리시온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마지못해 인정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분명 존재했던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저 당시의 너는 조그맣고 약하고…….”

    어린 시절, 에리스텔라는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하인리시온이 아주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너무 커다랗네.’

    에리스텔라는 옆의 하인리시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인리시온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기면서도 에리스텔라의 빤한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그나저나…….

    “이거 아무래도…….”

    지금 두 사람의 앞에 있는 건 실제로 있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그런 거 같지?”

    가상이 아닌 분명 두 사람에게 실제로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건 결코 허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우리 둘 중 하나의 기억이야.”

    누구지.

    지금으로서는 누구의 기억 속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그러다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겠지.

    에리스텔라와 하안리시온이 어렸을 적 자신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지켜볼 때였다.

    어린 에리스텔라가 방향을 틀어 달렸다. 정확히 현재의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있는 곳이었다.

    당황한 두 사람이 피하기도 전.

    아이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쌩 지나갔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거 같지?”

    뒤이어 달려오는 어린 하인리시온 역시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적어도 두 사람을 봤다면 그럴 리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켜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거 같아.”

    하인리시온은 부러 두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보여 주는 거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하나부터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해야 했다.

    “그나저나 여기가 누구 기억인지는 어떻게 알아보지?”

    가장 먼저 이곳에서 본 것이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이었으니 둘 중 하나의 기억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함께 있어서 그런지 도통 어느 쪽의 기억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지켜보다 보면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모르고 한 사람만 아는 상황이 벌어지겠지.”

    “…….”

    에리스텔라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혹시 보이기 싫은 기억이라도 있어?”

    하인리시온의 도발에 에리스텔라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그럴 리가! 내 기억은 전부 떳떳해서 전혀 상관없어.”

    아니다. 보여 주기 싫은 기억 천지였다.

    제발 내 기억만은 아니기를.

    ***

    사실 하인리시온도 눈앞의 광경이 혹시라도 자신의 기억일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자신의 기억을 보게 된다면 에리스텔라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과연 누구의 기억일까.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은 아니길 바라며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어……?”

    뭔가를 발견한 듯 하인리시온이 낮은 탄성을 내며 놀랐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에리스텔라는 질문을 채 이어 가지 못하고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하인리시온이 왜 놀랐는지. 그리고 이곳이 누구의 기억 속인지.

    방금 어린 에리스텔라가 중얼거린 한마디.

    “에이. 진짜 신경 쓰이네.”

    그러면서 절뚝거리며 자신을 쫓아오는 어린 하인리시온을 향해 돌아섰다.

    과거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그런 말을 하며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인리시온에게는 없는 기억.

    그리고 에리스텔라에게는 있는 기억.

    “어차피 따라잡지도 못할 텐데 왜 자꾸 따라와.”

    “……같이 놀고 싶어서.”

    일부러 짓궂게 타박을 해도 어린 하인리시온은 그녀가 내민 손을 소중하게 꼬옥 붙잡았다.

    옆의 커다란 남자를 보면 절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에리스텔라라면 그런 하인리시온을 몹시 놀렸겠지만 어렸을 적에는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나 보다.

    “나는 약한 애랑은 안 놀아.”

    여전히 모진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한결 풀어져 있었다.

    “금방 강해질 거야.”

    에리스텔라의 말에 자그마한 하인리시온이 굳세게 다짐했다. 그 모습이 쬐끔 귀여워 보였다.

    “정말? 강해질 수 있어?”

    “응!”

    떠보듯 되묻는 말에 어린 하인리시온은 몸이 흔들릴 만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도와줄까? 나처럼 강해지면 놀아 줄게.”

    “진짜?”

    “응. 강해지고 싶지?”

    “라라랑 놀고 싶어!”

    어린 황녀의 눈에 반짝이는 장난기를 눈치채지 못한 순진한 하인리시온은 신이 나 외쳤다.

    “……누가 라라라고 불러도 된댔어!”

    에리스텔라가 한 박자 늦게 발칵 화를 냈다.

    “그거 우리 엄마 아빠랑 오빠만 부를 수 있는 거야!”

    화를 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해서 흥분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우. 지금 보니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게 티 나는 거야.’

    에리스텔라는 과거의 자신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 하인리시온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에리스텔라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과거의 모습에 하인리시온 역시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건 꽤나…… 아주 많이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의지와는 다르게 꼬꼬마 아이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 따라올 수 있게 되면 그때 부르게 해 줄게.”

    “응?”

    “라라라고 불러도 된다고.”

    “정말?”

    허락이 기뻤는지 하인리시온이 짧은 다리로 폴짝 뛰어올랐다. 당장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에리스텔라가 또다시 당황했다.

    “나를 쫓아올 수 있어야 부를 수 있다니까. 지금 당장은 안 돼!”

    “응! 나 따라잡을게. 할 수 있어!”

    어린 에리스텔라가 선을 그으며 단호하게 조건을 달았지만 대공가의 꼬마 도련님은 마냥 해맑았다.

    그런데 그 말간 모습에 되레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과거의 그녀였다.

    ‘왜 네가 당황해?’

    에리스텔라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정신 차리라고 외치고 싶었다.

    설마 하인리시온이 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차마 옆에 있는 그에게 확인 사살을 당하고 싶지 않아 앞만 바라볼 때였다.

    “하여튼 말만 잘한다니까. 그럼 한번 따라와 보든가.”

    다행히 평정심을 되찾은 어린 에리스텔라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에리스텔라의 눈에는 다 보였다.

    어렸던 자신이 아까보다 속도를 늦춰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부터는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공통된 기억이었다.

    더 지켜볼 것도 없었다. 누구의 기억인지는 이미 확인되었으니까.

    에리스텔라가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절규했다. 결국, 빌고 또 빌었지만 당첨이 된 건 에리스텔라였다.

    ‘왜 나야!’

    하인리시온은 눈앞의 상황이 그녀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 모두 알아차렸다.

    ‘흑역사를 직접 보는 기분이야. 으아. 너무 끔찍해…….’

    큼…… 크흠…….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헛기침과 침묵이 간헐적으로 흘렀다.

    그러다 문득 에리스텔라의 신경이 곤두섰다.

    방금 보았던 흑역사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모든 기억이 발가벗겨진다는 건 거대한 해일과 같은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일이었다.

    에리스텔라가 바로 옆에 있는 하인리시온을 의식하며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해서든 떠올려야 했다.

    ‘근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미치고 환장하겠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인리시온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 떠올랐다.

    그럴수록 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앞에 꼭……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아주 불길한 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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