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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9)화 (69/123)

69.

추격전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 주변에 있는 건 확실한데 좀처럼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어느새 황궁 뒤편에 있는 산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 더 도망갈 수도 없을 텐데 흑마법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하나. 왜 이렇게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 거야.’

에리스텔라가 혀를 차며 주변을 살펴볼 때였다.

“제가 어떻게 두 분을 상대하겠습니까. 꼭꼭 잘 숨어야죠.”

어디선가 흑마법사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눈치는 왜 이렇게 빨라?

방금 내가 생각을 말로 꺼냈었나. 아닌데.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시선으로 물었을 때였다.

“눈치가 있어야 사람들의 심리를 쉽게 간파하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흑마법사 놈에게서 들려왔다.

에리스텔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읽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게 굉장히 불쾌했다.

“이런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래. 바로 이러는 거.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괜히 흥분하지 마.”

“안 해. 그냥 짜증 날 뿐이야.”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입매가 비뚜름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저는 황녀 전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데요.”

그럴수록 흑마법사는 도발해 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에리스텔라가 직접 상대하지 않도록 막아선 채로 하인리시온이 단호하게 대응했다.

“지금 저놈은 우리 얼굴이 정확히 보이는 곳에 있어.”

그렇기에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보고 에리스텔라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인리시온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작은 단서 하나로도 흑마법사가 있을 위치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역시 대공 전하께서는 예리하시네요.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들키겠어요.”

흑마법사가 감탄하면서 겁을 먹은 척했지만 목소리에서 여유가 폴폴 묻어났다.

“역시 저는 황녀 전하랑 좀 더 잘 맞는 거 같습니다.”

에리스텔라를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던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때였다.

에리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쓰윽 올라갔다.

“뭐야? 불길하게 왜 그렇게 웃어?”

에리스텔라의 웃음에 가장 긴장한 건 하인리시온이었다.

그녀의 웃음이 점점 사악해지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괜한 걸 고민하고 있었더라고.”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밑밥을 까는 거지. 벌써부터 불안해졌다.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하면서 말한다고. 안 그래?”

“?”

점점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다만, 그녀의 말이 굉장히 불길한 신호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인리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을 때였다.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말하면 되는 거잖아?”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삐딱하게 흑마법사를 향했다.

“이를테면…… 저놈은 굉장히 재수 없고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내 눈에 걸리는 날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

“…….”

“볼 것도 없는 놈이 꽁꽁 싸매고 있네. 그런다고 네 음침한 본성을 모를 줄 알아?”

에리스텔라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조금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이렇게 생각나는 그대로 말하면 저놈의 얄팍한 능력도 소용이 없어지잖아?”

에리스텔라가 내린 해답은 지나치게 간단명료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하. 개운해.”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몹시나 가벼운 얼굴로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그녀의 진심을 낱낱이 들어야 했으니까.

그것도 에리스텔라의 얄미운 목소리로 직접.

“하. 하하……. 역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네요.”

흑마법사의 목소리가 질려 있는 게 느껴졌다.

“넌 얼굴도 안 보이면서 감정은 다 드러나는구나?”

에리스텔라는 점점 더 신이 나서 말을 쏟아 내었다.

“옛날 생각난다. 시온, 어릴 때 우리 숨바꼭질 하던 거 생각나?”

“지금 그건 갑자기 왜?”

하인리시온이 불안한 시선으로 에리스텔라를 돌아봤다.

“그때 내가 너 찾다가 그냥 가 버렸는데 네가 한밤중까지 숨어있다가 무섭다고 엉엉 울고 난리 났었는데.”

“…….”

에리스텔라는 흑마법사도 아닌 하인리시온의 치부까지 서슴없이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을 왜 해.”

하인리시온은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방금 떠올랐거든. 내가 말 안 해도 어차피 쟤는 내 생각 다 읽는데. 뭐.”

에리스텔라가 아무 말이나 떠들수록 흑마법사에 대한 하인리시온의 반감이 더욱 강해졌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야. 걸리기만 해 봐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분이 찝찝해진 것은 하인리시온만이 아니었다.

신나서 아무 말이나 쏟아 내던 에리스텔라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거기 흑마법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내가 한번 맞춰 볼까?”

에리스텔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흑마법사를 찾는 시늉을 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음…… 하지만 역시 그건 모르겠네.”

어이없다는 눈으로 하인리시온이 쳐다보자 에리스텔라는 더 들어 보라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야. 내가 이번에 세뇌에 관해서 열심히 알아봤는데.”

에리스텔라가 낮아진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더 잘할 거 같더라고. 혹시 맞아?”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그저 떠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 역시 없었다.

“그럼 좀 힘들겠어. 그런 감수성으로 사람의 정신을 쥐고 흔들면 자칫 잘못했을 때 너 자신도 휘말릴지 모르니까.”

에리스텔라는 빈정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흑마법사를 걱정했다.

“그런 실수 따위…….”

그러자 지금껏 아무 반응 없던 흑마법사가 반박하듯 입을 뗐다가 급하게 닫았다.

“어? 정말인가 보네?”

기다렸다는 듯이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휘어졌다. 덫에 걸린 것이다.

“세뇌같이 더러운 짓을 해서 감정이고 뭐고 없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가 봐?”

흑마법사는 결국 쉬지 않고 말하는 에리스텔라 때문에 질리고 말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울컥하기도 하고.

“우리 이렇게 밤새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겠네.”

에리스텔라가 즐거워하며 말했을 때였다.

“그것도 구미가 당기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슬슬 때가 됐습니다.”

“때?”

“제가 설마 두 분과 담소라도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붙잡아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건 그들 역시 숨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눠보면 저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단 말야.

“이제부터 제가 차려놓은 것들을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 놈의 준비가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

그 순간이었다.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면서 눈앞이 희미해지고…….

잠깐만. 뭔가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언제부터 이런 향이 주변에 퍼지고 있었던 거지.

설마 처음부터 이 이상한 향을 맡고 있었던 건가. 다급하게 코를 막았을 때였다.

“이미 늦었습니다.”

흑마법사의 비웃는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틀렸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하인리시온의 팔을 붙잡아 보지만 이미 한계였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이 들자마자 긴장하며 주변 상황을 살피는데 조금 전과는 다른 장소가 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인리시온 역시 같은 생각인지 잔뜩 경계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에 걸려든 거 같은데.”

분명 땅에 발을 딛고 있는데도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감각. 눈앞의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건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가 현실이 아닌 거겠지.”

그놈의 흑마법 특성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최면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흑마법사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 그들을 가둔 것이다.

하인리시온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 거지?”

“글쎄. 왠지 눈에 익기는 한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묘하게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이 어디인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잘 조성되어 있는 정원. 어릴 때 많이 본 적 있는 꽃.

‘잠깐. 어릴 때 본 적 있는……?’

에리스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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