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자정이 넘은 시각.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과 소니아와 함께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멀지 않은 거리에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기사단이 대기 중이었다.
먼저 나서지 않고 근처에서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는데.
예정된 장소에 도착한 그레타의 곁에는 라테른 후작이 함께였다.
당장 상황만 보아서는 그레타가 라테른 후작에게 빌붙은 것처럼 보였다.
라테른 후작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선 그를 향한 적개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의 거리가 제법 되었기에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마법을 사용해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이번 일만 제대로 끝내고 나면 앞으로는 너에게 모든 걸 맡기려고 한다.”
“저는 아버지한테만 인정받으면 돼요.”
“하하. 그래. 사교계의 소문 따위는 무시하거라. 내가 앞으로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 나중에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찮았다.
저 모습만 보아선 후작에 대한 응어리는 잊은 듯했다. 오히려 후작의 신뢰를 되찾고 자신들을 붙잡기 위해 함정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소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역시 우릴 속인 거예요.”
소니아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처에 다른 함정이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은 물러나는 게…….”
매복이라도 되어 있으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듯 그레타를 예의주시하며 지켜보던 에리스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판단하기에는 일러.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
에리스텔라가 침착하게 소니아를 진정시키며 그레타를 자세히 살폈다.
분명 상황이 수상하기는 한데.
“혹시라도 매복한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쓸 것 없어. 기사단에게 미리 언질해 뒀으니.”
그의 기사단은 단순히 대기 중인 게 아니라 매복 등 위험 요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다른 사람이 오고 있어.”
하인리시온이 한쪽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구지?”
망토를 걸친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어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망토를 둘러쓴 자가 그레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라테른 후작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망토를 쓴 자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했다. 그런데 그레타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처음에는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저들의 행동에 윤곽이 잡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에리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지금 마법을 거는 것 같지?”
“아무래도.”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세뇌다.
지금 그레타 라테른은 세뇌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한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가만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나서려고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섣불리 움직여서 망치면 안 돼.”
하인리시온의 말이 맞았다. 에리스텔라는 나서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당장 움직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버텼다.
상황을 지켜볼수록 흑마법으로 그레타를 세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점점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나고 있을 때였다.
그레타가 흑마법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마 마지막 의식을 붙잡고 한 행동일 것이다.
그녀가 보내는 신호였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걸 신호로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멈춰.”
주변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미풍과 균열을 일으키는 목소리에 라테른 후작과 흑마법사의 행동이 멈췄다.
“누가 알고 찾아온 거…… 대공 전하……?”
하인리시온을 보고 사색이 된 후작이 그 옆에 있는 상대를 보더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함했다.
“어떻게 황녀가……?”
라테른 후작은 에리스텔라를 발견하고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보는 게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눈앞에 있는 황녀로 인해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상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에리스텔라는 라테른 후작을 무시한 채 서둘러 그레타의 상태를 살폈다.
눈동자에 초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완전히 잠식된 건 아니겠지.’
초조하게 확인하던 에리스텔라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잠식당하기 직전이었다. 마법이 완전히 발동되기 전이라면 더 강한 마력으로 막을 수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세뇌가 온전해지기 직전에 자신의 마력으로 훼방을 놓았다.
그레타의 정신에 어느 정도 타격은 있겠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제정신이야? 정말 세뇌에 걸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에리스텔라가 그레타를 향해 버럭 신경질을 냈다.
그녀가 제안한 거래에 직접 세뇌 대상이 되라는 조건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굳이 피곤하게 기록을 찾는 것보다 눈앞에서 찾던 사람을 직접 잡는 게 확실하잖아요?”
하지만 그레타는 오히려 태연했다.
이게 제정신인가. 에리스텔라의 눈이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증거가 생기는 걸 테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
그제야 에리스텔라는 그레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라테른 후작을 끌어내야만 했거든요.”
“너……! 역시 감히 가문을 배신하고 있었어. 네가 제정신인 것이냐!”
대화를 듣던 라테른 후작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레타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멍청하게 그동안 상상도 못했지 뭐예요.”
그레타가 자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아버지인 라테른 후작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산후에 병을 얻으신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에리스텔라는 분명히 보였다.
그레타의 말에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후작의 어색한 반응을.
“당신이 흑마법과 손을 잡았다는 걸 알고 나니 눈이 뜨이더군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감히 아비한테!”
후작이 호통을 치며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당신이 죽였을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을 하니까. 몇십 년이 흘렀는데도 너무 허무할 정도로 증거가 쉽게 나오더라고요.”
후작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본 그레타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실 지난 며칠 동안 그레타가 방에 틀어박혔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실은 라테른 후작이 흑마법과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일부러 상실감과 창피함에 자포자기한 것처럼 위장했다. 후작의 감시를 피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게 확실해진 순간 에리스텔라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매순간 후작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웠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당신이 내게 세뇌를 걸든 무슨 짓을 하든 나는 화만 내다가 제풀에 지쳤을지도 몰라.”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레타가 울분을 토해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고통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따, 딸아. 아비의 말을 일단 들어보는 게 …….”
후작이 당황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레타의 얼굴은 싸늘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그냥 두고만 봐.”
그레타의 결연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흘러 퍼졌다.
***
그레타가 후작을 붙잡고 있는 사이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망토를 쓴 자를 쫓고 있었다.
‘역시 라테른 후작이 저질렀었구나.’
짐작은 했지만 설마 싶었다.
에리스텔라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도를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저놈을 꼭 잡아야 한다.
저 앞에서 도망치고 있는 흑마법사는 분명 세뇌, 최면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직 얼굴도 못 봐서 정확한 신분을 확인하지도 못했고.
어떻게든 붙잡아서 정체가 뭔지 확인해야 하는데.
‘근데 왜 이렇게 잘 도망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