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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7)화 (67/123)
  • 67.

    ‘대비를 해 두는 게 좋겠지.’

    언제까지고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그레타가 반항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 같아 찝찝하기도 하고.

    어차피 더는 쓸모가 없는 패.

    그게 지금 그레타 라테른의 가치였다.

    사실 그레타 라테른은 언제나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그레타 역시 흑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마 지금쯤 그가 비밀리에 행했던 일들까지 모두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동안 그녀를 통해 한 일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 그레타도 정리를 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완전히 끊어내든지 아니면 이대로 완전히 손아귀에 넣던지.

    마침 방법이 있었다. 후작은 곧바로 집사를 불렀다.

    “그레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아직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나?”

    “오늘은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사는 그날의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그레타에게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던 후작이 딸의 근황을 묻자 의외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래? 마침 잘됐네. 나한테 오라고 전해.”

    후작의 명령에 집사는 그레타를 찾고자 몸을 돌렸다.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후작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

    그레타는 며칠 만에 방에서 나왔다.

    저택 내에서도 그녀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 활보했다.

    거래를 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움직이려면 이런 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녀가 말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한번 봐야만 했다.

    ‘기록해 놓은 것들을 어디에 보관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 장소가 몇 군데 있기는 한데. 모두 찾아볼 수는 없으니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해.’

    그런데 다행히 먼저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후작께서 찾으십니다.”

    마음의 준비를 한 그레타는 바로 집사를 따라 후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후작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구나.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걸 뻔히 알면서도 묻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흑마법과 깊게 연루되어 있었다. 심지어 자신도 끌어들이고 있었다.

    후작은 마법을 전혀 쓸 수 없으니 흑마법을 쓴 자가 후작 본인은 아닐 거다.

    연결책인 거겠지.

    그레타가 후작을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번 일로 곤란해진 것을 알고 있겠지. 나 역시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다 보니 활동의 폭이 좁아졌다.”

    “…….”

    “내가 그동안 네 뜻을 존중해서 너에게 가문의 일을 맡기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너를 계속 믿고 일을 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해.”

    라테른 후작은 시종일관 그레타를 향해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를 향한 걱정이나 위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덕분에 그레타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냉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돌려 말하지 않으마. 너도 이제 알 건 다 알았겠지.”

    “네.”

    그레타도 속내를 숨기지 않고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후작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내 딸이라니까. 모르는 척하지도 않는구나. 이 비밀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너도 알게 된 거다. 부인이나 레일라도 전혀 모르고 있는데 말이지.”

    마치 그레타를 특별하게 여겨 일을 맡겼다는 듯한 말투였다.

    자신이 아끼는 두 사람은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면서.

    웃고 있는 그레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너는 특별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너에게만 이 모든 일들을 믿고 맡길 수 있어.”

    후작은 두터운 신뢰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어딘지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만, 뭐든 열쇠는 한 사람이 쥐고 있는 게 안전한 법이란다.”

    라테른 후작이 뱀처럼 가늘어진 눈으로 그레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를 온전히 믿어도 된다는 보장을 받고 싶구나.”

    말은 번드르르했지만, 결국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녀의 정신을 자신이 손에 쥐겠다는 것. 즉, 세뇌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딸을 위하는 척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레타. 내가 너를 믿어도 될까.”

    후작의 속내를 눈치챈 그레타는 순간 동요했으나 이내 차분하게 대응했다.

    “저는 그동안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은 전부 했어요.”

    “그래도 어쩌겠느냐. 가문을 이끄는 자로서 나는 몇 번이나 의심하고 또 확인할 수밖에 없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자에게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으니.”

    그는 언제나 그레타에게 인내와 희생을 강요했다.

    “네가 나에게 믿음을 주거라.”

    그 억지스러운 강요를 받아들여야만 그레타는 인정받을 수 있었다.

    후작의 뜻은 한결같았다. 의지와 자아를 잃은 인형이 되라니, 그게 과연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일까.

    “네가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거야. 망설일 이유라도 있니?”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그레타의 얼굴이 가볍게 풀어졌다. 오히려 살짝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게요.”

    그레타는 선뜻 받아들였다.

    마치 자신은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처럼.

    “대신 아버지도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약속?”

    그레타의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던 후작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네. 그래도 제 정신을 맡기는 건데 그 정도쯤은 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아버지의 반응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요구했다.

    “그래. 말하거라.”

    잠시 고민하던 후작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저는 아버지라면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제게 세뇌를 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잖아요.”

    “아비가 보장하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게다가 저는 얼마 전에 흑마법에 연루됐다는 오해를 받아서 곤욕을 치렀어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세뇌를 받을 수는 없어요.”

    그녀의 걱정은 괜찮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그가 명분상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제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죠.”

    그러니 직접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쉽게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지만 그것마저도 완전히 거부할 수 없었던 후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혼자 방으로 돌아온 그레타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에 대해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버지가 제시한 믿음의 대가는 가능하다면 피해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피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대체할 만한 다른 믿음의 증거를 보여 주는 것.

    ‘황녀의 존재. 그리고 황녀가 내게 내민 제안을 고백해야겠지.’

    누구의 손을 잡을지.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지.

    그레타는 펜을 잡았다.

    그리곤 에리스텔라 황녀에게 보낼 서신을 고민 끝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약속대로 그레타 영애에게서 답변이 왔어요.”

    소니아가 약속된 장소에서 서신을 회수해 왔다.

    서신에는 부연설명도 없이 시간과 장소만이 적혀 있었다.

    “당장 오늘 밤이네.”

    “이건 아무래도 수상해요. 지금까지 계속 잠잠하다가 갑자기 당일에 약속을 잡는 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

    소니아는 서신의 내용이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듯했다.

    “원래 약속했던 건 이게 아니잖아요.”

    라테른 후작 같은 기록광이 접촉한 흑마법사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라테른 후작의 기록물을 어디에 보관해 뒀는지 알아내서 알려 주기로 한 건데…….”

    라테른 후작의 기록물을 찾아내고 후작에 대해 증언하는 것.

    그게 그녀와 합의된 내용이었다.

    “이건 일부러 이 장소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서신을 다시 확인해 보니 정확한 위치를 그린 약도가 함께 있었다.

    그곳은 라테른 후작가에서도 가장 내밀한 곳이었다.

    약속과는 다른 서신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갑자기 이렇게 부르는 건 아무래도 찝찝해요.”

    “…….”

    서로 접촉을 할수록 노출 위험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만나는 건 기피해야 했다.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라 에리스텔라가 고민에 잠기는데.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우리가 찾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일단은 가 봐야 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하루라도 빨리 황제에게 세뇌를 건 흑마법사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위험 요소가 있어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 저도 갈게요.”

    소니아가 말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마법은 못 써도 검술은 좀 하는 거.”

    소니아는 어릴 적부터 검술을 혼자서 연습해 왔고, 시녀가 된 후에는 에리스텔라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짐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소니아는 이미 결심을 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이 함께하겠다고.

    에리스텔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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