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6)화 (66/123)

66.

“그렇다고 왜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라테른 후작가에서 나와야 해요?”

그레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게 더 이득일지 저울질하며 의문을 내걸었다.

에리스텔라는 예상했던 일인 듯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심심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테니까. 무모하고 극단적인 행동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거 알잖아.”

“나를 그렇게 내몬 게 황녀 전하시죠.”

그레타는 원망스럽다는 듯 에리스텔라를 노려보았다.

“네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

에리스텔라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네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 거라고.

그때였다. 그레타의 굳은 얼굴이 서서히 변하더니 피식,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전하가 생각하는 대로…… 나는 단 한 순간도 내 아버지를 진심으로 따른 적 없어요.”

“…….”

“내가 그동안 아버지 명령을 따른 건 오로지 나를 위해서였어요.”

어느새 그레타의 눈이 붉어졌다.

“적어도 돈을 가지고 있어야 힘도 생기니까.”

“…….”

“그래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람이 난 걸로도 모자라 어머니를 병들게 만들어 돌아가시게 한 인간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만 나만의 힘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울분을 토하듯 말하던 그레타는 갑자기 침묵하더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라테른 후작가를 차지하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복수하는 방식이니까.”

라테른 후작가의 복잡한 가족사에 대해서는 에리스텔라도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현재 라테른 후작 부인은 그레타의 친모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재혼한 상대였다.

그리고 그레타와 동갑인 자매의 존재는 그 당시에 엄청난 스캔들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레타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자매와 대외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한때의 스캔들로 치부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아니었던 거다.

그녀는 가문 안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걸 위해 더러운 손도 몇 번이나 잡았는데.”

그레타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툭하면 나와 어머니를 모욕하는 레일라의 비위를 맞추고 속도 없는 것처럼 웃었어요.”

오히려 더 지극정성으로 레일라를 챙기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오직 한 가지 상상만 했어요. 마지막에 내가 모든 걸 차지하고 빈털터리가 된 그 사람들의 모습을. 그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복수하는 상상을 하면 이깟 수모쯤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녀가 항상 꿈꾸던 결말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올 거라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다다를 수는 없었다.

그레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에리스텔라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모든 게 끝났어요. 나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아도 된다고 여겼는데.”

결국, 그 때문에 자신은 원하는 바를 얻기 전에 무너졌다.

그런데 우습게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 역시 황녀라니.

그레타는 복잡한 시선으로 에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봤어요. 그중 가장 가능성이 낮은 게 당신의 존재였는데.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나를 찾아왔네요.”

그레타는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펼친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게 날아갔는데…… 고작 이 정도 제안에 겁낼 게 뭐가 있겠어요?”

어느새 그레타의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그레타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는 망설임보다는 확신이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일 작정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감마저 어렸다.

***

에리스텔라는 라테른 후작가를 조용히 빠져나와 대공가로 돌아왔다.

그리곤 바로 소니아와 샬롯에게 그레타와 합의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레타 영애를 믿어도 될까? 지금은 진심이라고 해도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도 있잖아.”

샬롯이 조심스레 염려되는 부분을 꺼냈다.

지금까지 그레타 라테른이 저질러 온 일들을 떠올린다면 그녀의 걱정은 일리 있었다.

“차라리 그동안 사람을 붙여서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보는 게 어때?”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소니아와 샬롯은 계속해서 그레타의 변심을 걱정했다.

하인리시온을 보니 그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세 사람의 조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리스텔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마음을 바꾸진 않을 거야.”

에리스텔라가 두 사람을 다독였다.

그레타의 만행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에리스텔라였다. 또한, 그녀를 가장 믿지 않는 사람 역시 에리스텔라였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이 순간.

에리스텔라 역시 오늘 만나기 전까지는 거래가 성사되어도 끝까지 그레타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본 그레타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라테른 후작이 몰락한 후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원한다면 라테른 후작가를 차지할 수 있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원하지 않을 만큼 후작가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일 것이다.

더 이상 명목상의 후작가라는 지위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남은 건 오욕과 오명밖에 남지 않은 빈 껍데기에 불과한 이름뿐.

게다가 영애가 직접 가문에 칼을 꽂았다는 불명예까지 안게 되겠지.

만약 이 모든 걸 피하고 싶었다면 그레타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 만약 조건을 걸었더라면 그중 반 정도는 들어줬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레타 라테른은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영악하게 잘 돌아가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는 에리스텔라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고민을 끝낸 에리스텔라가 서서히 입술을 뗐다.

“그 정도는…… 믿어 주자.”

자칫 일이 틀어지면 황제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리스텔라는 그레타 라테른을 처음으로 믿기로 선택했다.

“네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나도 믿어.”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레타 라테른을 믿는 게 아니라 에리스텔라의 선택을 믿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도 없는, 순수한 믿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레타가 내 시녀로 지낸 시간이 몇 년이더라.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레타가 가지고 있는 송곳을 짐작하면서도.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족을 밀어내고 가문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슬픔을 보지 못했다.

그레타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사무치는 감정이 향하고 있었던 곳은…… 후작가의 영광이 아니었다.

‘어쩌면 관심이 없었던 걸지도.’

에리스텔라 역시 그레타 라테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으니까.

에리스텔라의 입가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

최근 브랜던 라테른 후작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일로 라테른 후작가 전체가 추문에 휩싸여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흑마법이라니.

오해라고 무마되기는 했지만 라테른 후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만에 하나 잘못되어서 수사라도 시작되었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후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동안 나름 제 역할을 잘하길래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그딴 실수나 저지르고. 한심하기는.’

고작 황녀가 영혼이 되어 나타났다는 게 무서워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최근 그레타가 기고만장해하던 모습이 떠올라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일 덕분에 확실히 깨달은 것도 있지.’

앞으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흔적을 모두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후, 지금까지 기록해 놓은 것들을 버리는 게 아깝긴 하지만…….”

전부 나중을 위한 보험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에 하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제국 내에서의 입지는 물론이고 흑마법사에게도 위협을 당할 터였다.

“……별수 없지.”

하지만 아무리 은밀하게 처리를 해도 물증 이외의 흔적들은 완벽히 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흑마법과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 딸, 그레타. 그 애가 알고 있지.’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사실 그동안 그레타를 통해 황녀궁에서 얻은 정보로 사업을 하고 그 물건까지 프리미엄을 붙여 경매를 해 나름 재미를 봤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흑마법사들과 연락을 취하고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

그레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미 흑마법사들과 거래하는 과정에 섞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레타가 곧 증거가 될 위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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