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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5)화 (65/123)
  • 65.

    결국 그레타는 자포자기한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황녀의 재산을 빼돌렸으니까.”

    자신이 저지른 일을 실토하며 그레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었다.

    흑마법과 연루되었다는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동시에 더는 사교계에 발을 디딜 수는 없을 거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나도 오랜 시간 황녀의 곁을 지키며 내 시간과 청춘을 바쳤는데…… 이 정도 대가도 원하면 안 되는 거야?”

    의미 없는 하소연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더 갉아먹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속으로만 삼킬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너무 간절한 거였어.”

    그러니 소니아든 누구든 그들이 갖고 있는 걸 뺏어서라도 차지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욕망을 버리지 않고 번들거리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여우의 모습으로 담담하게 모든 것을 체념한 그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레타가 빼돌린 재산은 전부 에리스텔라가 소니아에게 주려고 한 것들이었다.

    그걸 이용해 라테른 후작가의 자금 문제를 해결하고 가문이 재기할 기반을 다졌겠지.

    그렇기에 그레타가 흑마법과 연루된 건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용서할 수는 없지.’

    그동안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었으니 도로 뱉어 내야지. 그에 대한 대가도.

    그레타를 바라보는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레타 라테른에 관한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녀가 부정으로 훔친 황녀의 소유권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황녀궁에서 모든 자금과 합당한 권리를 소니아에게 준다는 황녀의 서신이 나왔어.”

    물론, 에리스텔라가 써 놓은 것을 몰래 넣어 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레타 라테른이 저지른 일들은 낱낱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흑마법에 연루된 자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안 나왔네요.”

    그레타 라테른이 저지른 일이 밝혀지고 소니아의 권리도 되찾았지만, 황제를 세뇌한 흑마법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실마리는 잡았어.”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에리스텔라는 황제에게 세뇌를 건 흑마법사와 연결이 되어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디서요?”

    “라테른.”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레타 영애는 분명 흑마법과는 연관이 없었잖아요.”

    “응. 그랬지. 그런데 라테른 후작가는 관련이 있어.”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이해가 되게…….”

    소니아와 에리스텔라의 대화를 지켜보던 샬롯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설마 그레타 영애가 그날 거짓말을 한 거였어? 그때 그 모습은 거짓말 같지 않았는데.”

    샬롯이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날, 그레타 영애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적어도 흑마법에 대한 결백만큼은 밝혀졌었다.

    그렇기에 라테른 후작가가 연루되었다는 말은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그레타는 정말 몰랐을 거야. 다만, 그녀가 지금까지 벌인 일들이 흑마법과 아주 관련이 없진 않을 테지.”

    그레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라테른 후작가가 어떠한 연관도 없는 건 아니었다.

    진짜로 브랜던 라테른 후작은 흑마법과 결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황제를 세뇌한 흑마법사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의심 가는 정황이 있었는데 그걸 이번에 확인했어.”

    그동안 에리스텔라는 여우의 모습으로 연회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녀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이들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다니는 여우를 곁눈질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에리스텔라는 많은 이야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떨어뜨려 놓으면 별거 아닌 조각들도 다 모아 놓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는 했다.

    그러던 중 알아차린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 그레타의 이복동생인 레일라 라테른이 조심성 없이 떠들어 대는 말들이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그레타보다 사랑받는 딸이라고 자랑하면서 그토록 아끼는 자신에게조차 아버지가 경매 물품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경매에 대해 흠을 잡는데 그사이에 여러 단서를 흘렸다.

    그때 처음 수상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소피아 하벨링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라테른 후작에게 의심이 갔다.

    그래서 경매 외에도 라테른 후작이 해오던 사업에 대해 은밀하게 조사한 끝에 아주르디 백작 내외와의 단서를 잡았다.

    심지어 라테른 후작이 흑마법과 손을 잡은 지 생각보다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아마도 라테른 후작이 황궁에 잠입해 있는 흑마법사와도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래서 이번에 그레타 영애에 대해서도 확인이 필요했다. 황녀의 물건을 빼돌리며 경매를 주도한 건 그녀였으니까.

    그녀 역시도 흑마법의 존재를 알고 개입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움직이는 것인지.

    “그런데 라테른 후작이 쉽게 움직일까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라테른 후작을 통해서 황궁에 잠입해 있는 흑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라테른 후작이 흑마법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 봬도 라테른 후작의 심계가 보통이 아니야. 그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을걸.”

    하루라도 빨리 황제에게 세뇌를 건 흑마법사를 잡아야 했다. 그러니 라테른 후작을 끌어내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라테른 후작을 움직이게 할 사람을 포섭해야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소니아와 샬롯이 우려하자 에리스텔라가 음흉하게 웃었다.

    “설마 그레타 영애를 포섭하려는 거야? 어떻게?”

    에리스텔라의 의도를 알아들은 샬롯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레타 영애는 지금 독을 잔뜩 품고 있을 텐데 협조하겠어요?”

    그레타는 자신을 몰아붙인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을 테니 오히려 악을 쓰며 훼방을 놓으려 할 수도 있었다.

    “설득해야지.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나려고 해. 내 진짜 모습으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황녀의 모습으로 그레타에게 정체를 드러낼 작정이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 갈게. 그 정도는 해야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하지.”

    “네 정체를 드러낸 순간부터는 포섭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거야.”

    “어떻게든 포섭할 거니까 괜찮아.”

    에리스텔라는 그레타 라테른을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그레타 라테른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복동생을 아끼는 척을 하고 있구나. 라테른 후작을 향한 강한 반발심을 참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연기를 해 오고 있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

    그레타 라테른은 방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도 찾아오지 않으니 이대로 어느 정도 잊혀질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한밤중에 불쑥 들이닥친 불청객만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당신이?”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가 궁금한 거야? 너를 왜 찾아왔는지가 궁금한 거야?”

    터질 듯이 커졌던 그레타의 눈이 차츰 가늘어졌다.

    “하긴. 전하께서는 그렇게 죽는 게 더 이상한 분이기는 하죠. 저를 왜 찾아온 건가요?”

    에리스텔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지. 그동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통이라면 궁금한 것투성이였겠지만 그레타는 결국 자신이 알아야 할 건 딱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안을 하려고 왔어.”

    에리스텔라가 그레타의 맞은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지?”

    처음엔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는 라테른 후작과 흑마법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 머리는 있으니까.

    “지금 나한테 가문과 아버지를 배신하라는 건가요?”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내가 찾아온 이유도 짐작하고 있구나.

    에리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라테른 후작을 배신해야 하는 건 맞지만 가문을 배신하는 거와는 다르지.”

    “그게 차이가 있을까요?”

    “그럼. 확실히 있지.”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라테른 후작의 지시를 따른 건 부녀의 정이라는 인간미 넘치는 이유가 아니잖아?”

    “…….”

    네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에리스텔라에게 그레타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건 기회가 될 수 있어.”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더욱 쐐기를 박았다.

    라테른 후작가에는 꽤 복잡한 가족사가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사교계에서 중심이 되기를 바라고 에리스텔라의 물건까지 탐낸 것 역시 그와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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