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3)화 (63/123)
  • 63.

    ***

    귀신 소동 작전.

    에리스텔라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고 계획대로 귀신 소동은 화끈하게 성공했다.

    기분 좋게 대공저로 돌아온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장난을 쳤다.

    “흐흐. 내가 아직도 에리스텔라 황녀로 보이니.”

    “그만 안 해?”

    이미 충분히 시달릴 만큼 시달렸던 하인리시온이 질색하면서 그녀를 밀어냈다.

    “두 번은 절대로 안 해.”

    하인리시온이 맹세하듯 중얼거리며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닦아 냈다.

    가만두었다가는 아침이 될 때까지 귀신 분장을 지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보기 싫은 사람이 지워야지.

    하인리시온이 얼굴을 벅벅 닦는대도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두 사람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밤 이후 벌어질 일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

    역시나 에리스텔라의 귀신 소동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일으켰다.

    그저 무성한 소문에 힘이 붙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리스텔라가 영혼으로 떠돈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에리스텔라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덕분에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턱을 추켜세우며 으스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인리시온은 어처구니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려 버렸다.

    에리스텔라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이렇게 계속 부채질하면서 누가 먼저 움직이나 구경하면 되는 거야.

    물론, 그걸 구경하려면 수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건 아델라시아 대공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곧 이상 행동을 보이는 이들에 대한 보고가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의외네?”

    보고서를 확인하던 에리스텔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 일을 벌이면서 이상 행동을 보일 몇몇 후보를 떠올리기는 했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크게 동요한 것은 예상 밖에도 그레타 영애였다.

    “그레타 영애가 나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설마 흑마법까지 연루되어 있을까요?”

    “글쎄.”

    사실 귀신 소동은 수많은 귀족들 중에 의심 가는 후보군을 추리려고 벌인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흑마법과 연루되지 않았더라도 에리스텔라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그레타 라테른은 후자이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뭐든지 확인은 필수니까.

    “어차피 확인할 기회는 한 번 더 남아 있으니까.”

    거기서 정확하게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레타가 뭐 하고 다니는지 주시할 필요는 있겠지.”

    단 하나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

    에리스텔라가 말했던 또 다른 기회가 바로 황궁에서 열리는 위로회였다.

    죽은 황녀가 부디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

    ‘미신을 참 좋아한다니까.’

    그러니 이런 기이한 현상이 있을 때는 황궁에서 나서서 사람들의 불안을 다독여 주는 행사가 열리기 마련이었다.

    “이때 분명 황녀궁에 접근하는 사람이 나올 거야.”

    에리스텔라는 확신했다.

    “그 사람이 가장 수상할 확률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위로회는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각자 조금씩 켕기는 게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홀에서는 죽은 영혼을 위한 노래가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인리시온이 한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하벨링 후작가의 노마님 소피아가 곁으로 다가왔다.

    “대공 전하. 오랜만입니다.”

    “여기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궁금해서 와 봤지요. 이미 죽은 황녀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 난리들인 건지.”

    하인리시온이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로회에 열성인 사람들을 구경하며 소피아가 후후 낮게 웃었다.

    “얼마 전에 서신을 받았는데 레이튼이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고 있다더군요.”

    “실력도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하인리시온 역시 서신을 받았다. 서신이 올 때마다 열의를 가지고 성장하는 조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인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리 만나서 말인데, 레이튼에 관해 해 줄 말이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생각에 잠긴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때, 레이튼을 마법 아카데미에 보내지 말라고 부추긴 자가 있었던데 혹 알고 있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믿고 맡겼더니 빌어먹을 놈이. 제 영향력을 잃을까 봐 수작을 부렸더군요.”

    레이튼의 후견인이었던 하벨링 후작 대리는 술과 노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이 라테른 후작이었는데.

    그가 하벨링 후작 대리에게 레이튼을 마법 아카데미에 보내지 못하게 하도록 바람을 넣은 것이었다.

    마법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모든 지원을 하며 마법사를 양성하는 곳이니 결국, 그곳에서 성장하면 그 능력을 제국에게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능력이 있으면 가문을 위해서 쓰고 그동안 돌봐준 후작 대리에게도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그러니 이미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를 아카데미에 보내서 남 좋은 일을 시킬 필요는 없다고 그에게 헛바람을 넣었다.

    “그러니 귀 얇고 욕심 많은 그놈이 혹한 것이었지. 그래서 보내지 않으려고 기사로 키우겠다며 고집을 부린 거고.”

    그녀는 한때 하벨링 후작 대리였던 자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게다가 레이튼에게 물어보니 라테른 후작이 레이튼에게도 직접 접근한 적이 있는 것 같더군요.”

    선량한 후견인의 모습을 하고서.

    혹시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그 길을 찾아 줄 수도 있다고 레이튼에게 사람 좋은 얼굴로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튼은 만약 배운다면 하인리시온에게 배우고 싶었기에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고 한다.

    “하여간 조카에게 무척이나 사랑받는 듯합니다. 좋으십니까?”

    “예. 그건 무척이나 기쁘네요.”

    하인리시온은 소피아를 향해 뿌듯해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감히 레이튼에게 손을 뻗으려고 한 라테른 후작에게 분노하며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늠하느라 바빴다.

    말을 마친 그녀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유유히 돌아갔다.

    ‘라테른 후작이 굳이 레이튼에게 접근했다는 게 찝찝한데.’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던 에리스텔라 역시 신경이 쓰였다.

    마법사도 아닌 라테른 후작이 굳이 후원자를 자처하다니. 굉장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은 우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지.”

    하인리시온의 낮은 목소리에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위한 위로회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부르는 합창을 듣는 에리스텔라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이 만약 진짜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원한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지.’

    에리스텔라가 아닌 자신들을 위한 노래였다.

    이러라고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지만 직접 보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여우가 불쾌하게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은 하인리시온이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위로를 한다고 황녀에게 닿을까요. 황녀를 어릴 때부터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마디 보태자면…….”

    이건 에리스텔라와 말을 맞춘 내용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인리시온은 선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금이라도 황녀에게 위로가 전해지기를 바란다면 황녀궁으로 향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곳에서 진심 어린 사죄를 전하는 게 더욱 효과가 좋지 않을까요.”

    하인리시온의 유도에 사람들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황녀의 방 안까지 들어갈 순 없더라도 입구에서만이라도 모양새를 갖추잔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다.

    ‘그럼 가 볼까.’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 있는 여우 한 마리가 기대감에 들썩이며 꼬리를 팡팡 쳤다.

    이제 제 발 저린 놈을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

    한편, 벌써 황녀궁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황녀궁 안을 잘 아는 것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

    “죽은 사람한테 무슨 힘이 있어. 괜히 겁만 주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조금은 애절하게 부탁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제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이런다고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리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함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온 뭔가를 황녀의 방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몸을 돌렸다.

    복도에는 위로회를 위해 촛불을 줄지어 켜 놓은 상태였다. 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밝혀 주었다.

    서둘러 돌아서려는 순간.

    “그레타 영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긴장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잠입하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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