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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2)화 (62/123)
  • 62.

    하지만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직접 움직이도록 유도하지 않고서는 찾아내기 힘들었다.

    에리스텔라는 그날 이후로 매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낸 결론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치밀하고 대단한 계획 같은 거 세울 줄 몰라.”

    직관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게 에리스텔라의 방식이었다.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은 제 발이 저려서 가만있지 못하는 법이니까.

    놀랍게도 에리스텔라의 충동적인 직관은 꽤 잘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조심해. 자칫 잘못하면 네가 살아 있는 걸 눈치챌 수도 있어.”

    하인리시온이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고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대로 에리스텔라가 살아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을 거다.

    그들은 이미 에리스텔라의 존재를 이 세상에 지웠다. 누구도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도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귀신이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왠지 이런 말을 하면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이상해질 거 같아서 에리스텔라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웃었다.

    ***

    에리스텔라의 계획에 신이 나서 두 팔 걷어 협조한 것은 샬롯이었다.

    샬롯이 자신만의 무기라면서 야밤에 들고 온 뭔가를 펼쳐 보였을 때 모두가 감탄과 놀라움을 표했다.

    “이게 다 뭐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내 배우 인생에 노하우가 다 담겨 있는 거야. 너는 믿고 따르기만 하면 돼.”

    그녀의 무기는 메이크업 장비였다.

    현존하는 모든 색은 다 품고 있는 듯한 색색의 화장품과 각종 도구들은 보기에도 화려했고 손을 대기조차 조심스러웠다.

    샬롯이 진지한 얼굴로 붓을 들었다.

    “자고로 원한이 가득한 얼굴이란 눈빛만 봐도 오한이 느껴지는 법이거든. 그래야 같은 행동을 해도 효과는 배가 되지.”

    샬롯은 에리스텔라의 피부를 창백하게 덧칠하고 두 눈은 어두운 색조로 화장해 강조했다.

    샬롯이 화장을 끝낸 에리스텔라의 얼굴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또 한편으론 어딘지 스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게 가능해?”

    에리스텔라 역시 거울을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짙은 속눈썹과 얼굴을 조금 가리며 흘러내리도록 손질한 머리카락이 어우러져 오한이 들도록 서늘하면서도 화려한, 대단히 기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나만의 무기라고 했잖아. 이 정도는 내 실력에 당연하지.”

    샬롯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듯이 에리스텔라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해요. 저도 배우고 싶을 정도예요.”

    소니아도 감탄하면서 에리스텔라의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공간에 한 명뿐이었다.

    얼굴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눈 밑이 어두워져 있는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에게서 샬롯을 떼어 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인리시온은 즐겁다는 듯이 낄낄거리는 세 사람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를 고정하는 마법을 걸면 내일 경매장에 가서도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샬롯이 하인리시온을 돌아보았다. 어서 마법을 걸지 않고 뭐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결국, 하인리시온은 아무 말 없이 고정 마법을 걸어 주었다.

    에리스텔라의 전신이 반짝 빛나더니 이내 빛무리가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

    경매장은 여러 상가가 모인 길목의 잡화점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당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귀족들의 접근성을 고려한 듯싶었다.

    게다가 오늘 밤 경매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왜 황녀의 물건으로 이런 경매를 하는지 알겠네.”

    경매를 지켜보던 샬롯이 낮게 중얼거렸다.

    샬롯은 황실과 인연이 있기에 경매에 나온 물건들의 가치를 남들보다 더 잘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가문의 가보와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뿐이었다.

    샬롯은 경매 물품에 관심이 있는 척 접근했다.

    동시에 경매에 어떤 물건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물건을 누가 사 가는지 예의주시하며 지켜보고 기억해 두었다.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에리스텔라의 물건들. 언젠가는 모두 회수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

    오늘 경매에 정식으로 참석하는 사람은 샬롯 한 사람뿐이었다.

    하인리시온은 정식으로 초대받은 적 없었고 모습을 드러낼 계획도 없었다.

    그는 오늘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경매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제국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져 오는 투명 코트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소유였다.

    하인리시온은 오늘을 위해 몇 번밖에 쓸 수 없는 투명 코트를 과감히 뒤집어썼다.

    그리곤 품 안에 여우 한 마리를 든 채로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장소에서 에리스텔라가 모습을 드러낼지 정하기 위해 경매장의 위치를 알아냈을 때부터 건물을 비롯한 주변 상황에 대해 조사했다.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가장 멀리 떨어진 휴게실에 잠시 몸을 숨겼다.

    오늘 밤 이곳에서는 다시 한번 황녀 에리스텔라가 나타날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귀신 분장까지 한 모습으로.

    그리고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우에서 원래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귀신 소동을 벌일 예정이었다.

    동시에, 하인리시온이 맡은 역할 역시 막중했다.

    샬롯이 경매장에서 황녀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바람잡이 역할이라면, 하인리시온은 또 다른 의미의 바람잡이였다.

    귀신이 되어 나타난 에리스텔라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보조 역할.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조명과 효과음은 기본이고.

    에리스텔라의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사라지게 해 주는 연출까지.

    하나의 완벽한 연극이 완성되자 에리스텔라를 목격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상황이 진행될수록 어째서인지 자괴감이 밀려와 하인리시온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장한 에리스텔라와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인리시온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해서 귀신 역할로 꽤나 잘 어울렸다.

    자괴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하인리시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선을 다해 연극에 열중하고 있었다.

    최적의 타이밍에 번개 같은 효과를 번쩍.

    혹시라도 에리스텔라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움직여도 제자리만 맴도는 착시 마법까지.

    내심 에리스텔라도 감탄할 정도였다.

    하인리시온의 활약 덕분이었을까. 에리스텔라를 마주한 이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

    작정하고 준비한 귀신 소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고, 그중 한 명은 기절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경매장에 있던 이들까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경매는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한 공간에 모였다.

    “저, 정말 있나 봐요. 죽은 황녀가…….”

    “정말 본 거예요?”

    샬롯이 은근히 떠봤을 때였다.

    “뭐, 뭘 봤다는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무래도 어디서 나를 봤나 본데?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스텔라는 제 발 저린 것처럼 구는 한 부인을 바라보았다.

    뭐, 내 의도와는 다르지만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보면 오히려 잘된 거 같네.

    그때였다.

    “……나는 봤어요.”

    또 다른 부인이 정신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해요. 그건 에리스텔라 황녀였어요.”

    “흐음. 그것참 이상하네요. 왜 몇몇 분 앞에만 나타날까요? 그냥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건지. 아니면 원한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건지 헷갈리네요.”

    샬롯이 혼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의문을 제시했다.

    샬롯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제 발 저린 사람들에게 의문을 제시하기엔 충분했다.

    “제, 제가 화, 화…… 황녀 전하께 원한을 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자 에리스텔라를 목격한 상황을 설명하던 부인은 찔리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되어 부정했다.

    “모두 걸리는 게 없으니 그럼 아무 문제가 없네요.”

    “…….”

    “왜 그러죠? 갑자기 뭔가 생각이라도 났나요?”

    샬롯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현 상황을 마구 휘저었다. 그럴수록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샬롯은 속으로 웃었다. 저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봤던 상황을 계속 곱씹을 테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겠네요. 모두 꺼릴 게 없으니 무서워할 필요도 없는 거죠. 그렇죠. 하하…….”

    “하긴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 리 없지요. 그저 죽은 황녀의 고약한 심보일 거예요.”

    샬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각자의 불안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들의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죄가 기분 나쁘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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