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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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품은 황녀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떠돈다.
그 소문이 가져오는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았다.
특히나 황녀와 얽혀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간 황녀의 죽음을 이용해 저지른 일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하인리시온을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혹시 이전에 황녀 전하께 무슨 언질이라도 들은 게 없는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은 정말 억울하다는 변명까지.
황녀 다음으로 가장 강한 마법사이니 제발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그들을 상대하고 난 하인리시온은 반나절 만에 피곤에 젖은 채로 돌아왔다.
“이걸 예상했던 거야?”
하인리시온이 내심 놀라 하며 물었다.
“뭐 이렇게까지 구체적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강 이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하기는 했다.
그간 몇 번의 연회를 비롯한 여러 상황을 접하면서 파악한 것들도 있었고.
에리스텔라에게 볼 꼴 못 볼 꼴을 보인 사람들 역시 적지 않으니까.
에리스텔라의 유령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지레 겁먹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황녀 에리스텔라가 절대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러니 황제의 증상도 그녀의 실종 시기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리스텔라가 황제의 상태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셨어. 이 정도였다면 이전의 내가 몰라봤을 리 없어.”
에리스텔라가 건재하던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황제에게서 이상한 낌새는 찾을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의 죽음을 확신하고 나서야 황제에게 본격적으로 손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에리스텔라의 눈치를 볼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 내 존재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은 귀신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의외로 황궁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황녀의 귀신이 떠돈다는 소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어쨌거나 일단은 반응을 보이는 자들부터 꼬리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절대 꼬리에서 잘리지 않고 몸통에 이어 대가리까지 물어야지.
에리스텔라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인리시온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가끔 보면 너…… 굉장히 논리적인 거 같아서.”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쭈욱 올라갔다.
“알고 보면 내가 원래 다 생각이 있거든.”
“……아무래도 그냥 얻어걸린 거 같다.”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리스텔라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니 자신이 넘겨짚은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냐. 이게 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내가 설계한…….”
“정말?”
“그럼.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함께해야 해.”
게다가 에리스텔라는 이 상황을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진짜로 나한테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이 내 모습을 제대로 보면…… 반응이 바로 나타나지 않겠어?”
에리스텔라가 악당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불안감에 쐐기를 박아 줄 거야.”
에리스텔라는 즐겁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의 계획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설마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인리시온이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너에 대한 평판은 또 이상해질 텐데. 그건 상관없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이미지에 무서운 귀신 소문까지 곁들이면 또다시 평판이 추락한단 점이었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왜?”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너무도 순수한 물음이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비난을 당연하게 받아 와서. 거기서 더 나빠지는 것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해 본 적 없었다.
“그보다 그로 인해 얻는 게 중요하지.”
에리스텔라의 관심은 오로지 결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
에리스텔라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기부회 이후 샬롯이 황녀의 물건을 취급한다는 경매에 계속해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샬롯이 잔뜩 신난 모습으로 찾아왔다.
“소개받았어. 곧 경매가 있을 거라고 해서 함께 가기로 했어.”
“마침 잘됐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언제 이런 준비를 했냐는 하인리시온의 시선을 느낀 에리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연회를 몇 번 가 보니까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너는 이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으니까 샬롯한테 부탁했었지.”
에리스텔라가 자랑스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레타 영애가 네 물건을 유통하는 거 같은데.”
“역시 그랬었네.”
“언제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그레타 라테른에 관해서는 에리스텔라가 샬롯에게 언질을 준 적이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한 말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샬롯은 매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추측만. 내가 사라지고 난 후 가장 날개를 단 듯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그럼 그레타 영애가 설마…….”
샬롯은 그레타가 흑마법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지. 그냥 우연히 이 상황 속에서 자기 이익을 잘 챙긴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경매는 예정대로 가는 거 맞지?”
“응. 소문 때문에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러기는커녕 네 말대로 반대더라.”
샬롯이 놀랐다는 듯이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황녀의 소문이 나니 오히려 더 관심이 폭발했나 보네.”
에리스텔라의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샬롯에게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드러내 보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지! 이번에 최고가를 찍을 거라는 말이 암암리에 돌더라.”
그럼 경매장에서 다시 한번 내 모습을 뽐내 볼까.
에리스텔라가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인리시온이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에리스텔라의 손이 그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에헤이. 어딜 내빼려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하인리시온의 귓가에 울렸다.
하인리시온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에리스텔라에게서 도망치듯이 샬롯을 돌아보고 화제를 바꿨다.
“자금은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어머. 고작 이런 지원을 바라고 제가 도와준다고 나선 줄 아시나요.”
샬롯이 손으로 쳐내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겼다.
“이건 제 돈으로 할 거예요. 저 이래봬도 능력이 넘치거든요.”
샬롯이 턱 끝을 올리며 근거 있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녀가 가수가 되어 번 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불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 주십시오.”
“그건 내 개인적인 부탁도 포함인가요?”
이럴 때마다 깨닫는다. 아, 샬롯과 에리스텔라는 피를 나눈 사이였지.
하인리시온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영애가 여우의 친구인 이상 어떤 부탁이든 유효합니다.”
“아델라시아 대공이 도와준다니. 벌써부터 든든하네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샬롯이 그의 호의를 덥석 물었다. 물론, 그럴 거라는 걸 에리스텔라도 하인리시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경매 장소랑 정확한 시간을 알게 되면 말씀드리러 올게요. 저는 내일을 위해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해서요.”
“늦은 시간에 오느라 고생하시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밤에 잘 자야 주름도 안 생기고 다음 날 목소리도 잘 나오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샬롯이 괜히 에리스텔라를 향해 눈을 흘기며 생색을 냈다.
“목에 좋은 음식들 보낼게.”
에리스텔라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주 최고급으로만 보내야 돼.”
샬롯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곤 손을 살랑 흔들며 돌아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돌아갔다.
그것도 아주 음흉한 얼굴을 하고서.
“자아. 그럼 우리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깊은 대화를 좀 나눠 볼까.”
“……꼭 해야겠어?”
하인리시온이 빠져나가 보려고 하지만 어림없었다.
“응. 완전. 꼭 해야 해.”
에리스텔라의 계략에 넘어간 건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하인리시온이야말로 에리스텔라의 마수에 완전히 걸려들어 있었다.
“거절은 사양이야. 그니까 잘 부탁해?”
“…….”
결국, 하인리시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에리스텔라의 황당한 계획을 함께하게 되었다.
***
그토록 공들여 세뇌를 걸어 놓았으니 당장 황제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대신,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만들겠지. 그렇게 이용하다가 서서히 말려 죽일 거다.
게다가 기부회가 있던 날 밤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뒤늦게 떠올랐었다.
이번 전쟁은 세뇌한 황제를 조종해 일으킨 것이다.
황제가 국경에서의 전투를 무리하게 진행한 것까지.
황제의 의지가 아닌 흑마법사의 의지인 것이다.
국경에서 벌이는 전투가 그들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흑마법사도 황제의 곁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해. 그중에 분명 황제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