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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0)화 (60/123)
  • 60.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마치 에리스텔라의 좌절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하인리시온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했던 말도 기억 안 나?”

    “…….”

    “힘이 없다고 싸움에 지는 건 아니잖아.”

    그건 두 사람이 어렸던 시절,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했던 말이다.

    하인리시온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강한 능력을 갖추었으나, 그 때문이었을까 아주 어릴 적에는 오히려 또래 아이들보다 약했었다.

    또래의 영식들과 어울릴 때면 짓궂은 무리의 교묘한 장난질에 여기저기 다쳐서 오는 하인리시온에게 에리스텔라가 했던 말이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돌려받다니.

    “게다가 지금 너한테는 나도 있는데. 힘이 부족해?”

    “……아니.”

    그래. 할 수 있다.

    에리스텔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냉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진짜 황녀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네 말이 맞아. 해야 할 일은 따로 있고. 지금 내가 가진 힘이 별 볼 일 없어도 고작 흑마법사 따위를 처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지.”

    에리스텔라가 오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실렸다.

    어지러웠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고 나니 뭔가 번뜩 떠올랐다.

    “이제 그만 놔줘.”

    에리스텔라가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하인리시온이 붙잡고 있는 팔을 내밀며 말했다.

    “시온. 나 정말 괜찮아.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그래.”

    “…….”

    “걱정 마. 사고 안 칠 거야. 지금 당장은. 그래도 발 도장 하나쯤은 남겨 놓고 가야지. 그냥 돌아가기는 아쉽잖아?”

    차분해진 것과 별개로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광기를 띤 채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향해 당부했다.

    “사고는 적당히. 알지?”

    “알지.”

    뻔뻔할 정도로 결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리스텔라가 굉장히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조금 전보다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낫다.”

    에리스텔라를 잡고 있던 하인리시온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금방 다녀올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꽤나 멋들어진 미소에는 항상 그녀가 지니고 있던 자신감이 가득했다.

    혼자 걸음을 옮긴 에리스텔라는 황궁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사뿐하고 우아하게.

    ‘지금 당장 모두의 앞에 나설 수는 없지만.’

    연회장을 비추던 화려한 조명 대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인 공간.

    누구든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복도를 에리스텔라는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보란 듯이 걸었다.

    마치 달밤에 산책이라도 하듯이 여유롭게.

    ‘적어도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해 주는 건 의미가 있겠지.’

    비록 그들에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에리스텔라는 그렇게 복도를 한 바퀴 돌았다.

    그게 그날 밤 에리스텔라가 한 일의 전부였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다.

    ***

    한편, 에슬렌타 부인이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취기가 올랐는지 발그레해진 얼굴을 살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찬바람으로 식히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타원형 구조의 복도 반대편으로 시선이 갔다.

    창문과 창문 사이로 어렴풋이 누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은데.

    “어……? 누구지? 황녀 전하처럼 보이는데…….”

    에슬렌타 부인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딸꾹.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말도 안 돼……. 어떻게 황녀가 여기에……!”

    에슬렌타 부인이 다급하게 돌아서 다시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창문 아래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고개만 들어서 창문 너머를 확인하는데.

    ……방금까지 분명 누군가 있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생겼었더라.’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리고 은발…… 이었던 것 같고.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미 취기가 오른 에슬렌타 부인은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정신을 차려 보려 조심스럽게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는데.

    “아, 아얏!”

    아팠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새파랗게 질려 갔다. 곧이어 황궁 한편에 가늘고 높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에리스텔라가 황궁 산책을 마치고 유유히 돌아왔을 때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맞이했다.

    이곳에서 계속 에리스텔라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으로 이미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지는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에리스텔라가 멈춰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봤다.

    “거기서 뭐 해? 빨리 안 오고.”

    하인리시온이 살짝 미간을 구기며 재촉했다.

    “다녀왔어.”

    어느새 하인리시온의 옆까지 다가온 에리스텔라가 기습적으로 인사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하인리시온의 모습을 보니, 황궁이 아니더라도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실감이 들어 그 모습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물론, 이 감정을 하인리시온에게 말해 주지 않을 거지만.

    “어디서 뭐 했어?”

    “산책하면서 구경 좀 하고 왔어.”

    “여기 뭘 구경할 게 있다고.”

    “걷다 보니까 내가 황궁에 사는 동안 그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닌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아서. 그래서 익숙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에리스텔라의 주위에는 시녀들이 항상 같이 움직였다.

    혼자 몰래 움직일 때도 그 뒤에 하인리시온이 따라다녔고.

    좀 더 컸을 때는 황궁 밖으로 혼자 몰래 외출하고는 했지만, 황궁 내에서는 불가능했다.

    어딜 가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까.

    오늘처럼 존재감 없이 돌아다닌 황궁은 화려하지만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원래 황궁이 이랬나 싶을 만큼.

    “그렇게 비장하게 가서 정말 황궁 산책만 했다고? 정말 그게 다야?”

    “응.”

    에리스텔라가 당당하게 대답했음에도 하인리시온의 시선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나는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에리스텔라의 떳떳한 얼굴이 어딘지 마음에 걸렸지만 하인리시온은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 에리스텔라에게는 힘든 날이었을 테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겠지.

    하인리시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에리스텔라를 향해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이 점점 붉어지면서 햇살이 올라왔다.

    동시에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를 하인리시온이 품 안에 들어 올렸다.

    “대체 얼마나 돌아다녔으면 드레스가 이렇게 더러워져.”

    하인리시온이 드레스를 가볍게 털자 먼지가 폴폴 풍겼다.

    “오늘 돌아가자마자 씻어야겠네.”

    ‘잠깐만. 설마 이번에도 네가……!’

    에리스텔라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하인리시온에 의해 묵살당했다.

    ***

    황궁 연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에리스텔라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하인리시온은 금방 알게 되었다.

    곧바로 황궁 연회에서 에슬렌타 부인의 목격담으로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 한 명 역시 에리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는 의외의 증언을 하면서 부인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시녀 역시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떴을 때 기이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에리스텔라의 뒷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점이 에슬렌타 부인의 목격담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황궁에서 에리스텔라 황녀의 영혼을 목격했다는 괴담. 아무래도 죽은 황녀가 황궁을 떠돌고 있는 것 같다는 괴담.

    귀신 소문을 접한 하인리시온은 단번에 눈치챘다. 이게 바로 지난번에 에리스텔라가 말한 발 도장이라는 걸.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에리스텔라의 행보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래 산책만 했겠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었던 건 아니지만, 이건 생각지 못한 방식이었다.

    “이게 네가 자신 있다는 계획이었어?”

    분노와 무력감으로 괴로워하던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찾아왔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태연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인리시온마저도 눈앞에 있는 에리스텔라가 진짜 귀신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녀는 하인리시온이 그렇게 물어올지 알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하하하하. 응!”

    에리스텔라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무 웃는 바람에 배가 아파서 끅끅거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를 보고도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그녀의 영혼이 떠돈다고 믿을 거라고.

    “앞으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길걸?”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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