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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9)화 (59/123)
  • 59.

    이미 여러 번 있었던 일인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행동.

    너무나 손쉽게 의지를 잃어버리는 황제의 모습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에리스텔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에리스텔라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세뇌인 건가.’

    황제의 이지를 잃어버린 모습을 보니 예전에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황녀 전하께서도 과연 세뇌에 걸릴지 궁금하네요. 아주 실력 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흑마법사 중에 강력한 세뇌 능력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놈이 황제를 노리고 세뇌를 했다면…….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황제의 달라진 태도는 물론이고, 국정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해진 것도.

    황제는 지금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 부분을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폐하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세뇌가 어떤 마법이었더라.’

    그때 에리스텔라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나중에 따로 세뇌 마법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세뇌를 이용한 공격이 이전에도 여러 번 있어서 관련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편이었다.

    세뇌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매우 강력한 흑마법이었다. 그 위험성 때문에 제국은 여러 차례의 곤욕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은폐했다.

    그 기록은 오로지 황궁 내 비밀 서고에만 존재했기에 에리스텔라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본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세뇌는 강력한 만큼 제한이 많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매우 어려운 흑마법이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그 순간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뇌를 완벽하게 파훼하는 법은 그 기록에 없었다. 대신 강제로 부순 기록이 있는데.

    그걸 마지막 촛불이라 불렀다.

    억지로 정신이 돌아오게 할 경우, 처음에는 제정신이 들어와 성공한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며 그대로 죽는다고 했어.’

    에리스텔라의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감히 제국의 황제에게. 감히 내 오라버니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

    온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솟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스텔라는 차마 황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가가면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가가는 순간 그가 깨져 버리기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로 꾹 버티고 서 있는데 황제는 도통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을 참지 못한 에리스텔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안 돼. 지금 내가 나서면 결국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황제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으나 에리스텔라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우선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갈 사람을 불러오자.’

    에리스텔라가 고통스럽게 돌아섰다.

    그리곤 서둘러 주변에서 믿을 수 있는 시녀나 시종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어릴 때부터 황제의 곁을 지켰던 하녀가 있었다.

    ‘폐하가 계신 곳으로 유인해야 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하녀의 손에 들려 있는 침대 시트가 보였다.

    곱게 접혀 있는 걸 보니 황제의 침구류를 정리하러 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저걸 신호로 보내면 되겠어.’

    하녀의 품 안에 곱게 접혀 있는 흰 시트를 본 에리스텔라가 마법을 걸었다.

    스윽-바람과 함께 하녀의 손에서 침대 시트가 스르르 빠져나왔다.

    “어?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하녀는 갑자기 날아가는 천을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천은 쉽사리 잡히지 않고 바람에 둥둥 떠다니며 떨어질 듯 말 듯 한참을 날아갔다.

    “바람도 많이 안 부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바닥에 떨어진 시트를 겨우 잡은 하녀는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흠칫했다.

    “……폐하?”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하녀는 황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하녀는 상체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황제의 상태를 살피더니 벌떡 일어났다.

    “어, 얼른 시종장님을……! 폐하. 잠시만요. 제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하녀가 다급하게 달려가는 동안 에리스텔라는 황급히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는 시종장을 데려왔고, 그들은 재빨리 쓰러진 황제를 살폈다.

    잠시 슬픈 눈으로 황제를 보던 에리스텔라는 이를 꽉 깨물며 돌아섰다.

    ***

    에리스텔라는 넋을 놓은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릿속은 무기력한 황제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방금 상태로 보면 세뇌를 당한 기간이 짧지 않아.’

    어쩌면 예상보다 더 길 수도.

    그런데도 황제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세뇌에서 벗어나고자 혼자서 발버둥 치느라 더욱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로.

    충격과 당혹스러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들불처럼 모습을 바꿨다.

    주체할 수 없이 손발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수가 없었다.

    황제는 흑마법에 연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흑마법과 손을 잡은 건 아니었다.

    ‘……당한 거였어.’

    흑마법에 당해서 의지를 잃었다. 그리고 점점 자아마저도 잃어 가는 중이었다.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렇게 흑마법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도망치듯이 복도를 달렸다. 새카만 바닷속에 잠긴 듯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수면 아래에서 발목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감정이었기에. 에리스텔라는 점차 가라앉았다.

    “에리스텔라.”

    어느새 그녀를 쫓아온 하인리시온의 목소리가 에리스텔라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돌아서서 그를 본 순간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폐하가 흑마법에 당했어…….”

    말문을 여는 게 신호였다.

    “당한 거였어…….”

    에리스텔라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에 불을 켜며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좀 차분하게…….”

    하인리시온이 어떻게든 에리스텔라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지금 그녀의 눈과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절대 가만 안 둬. 감히 제국을 어떻게 보고. 황제를 건드려?”

    분노에 휩싸인 에리스텔라는 당장이라도 무슨 짓이든 벌일 기세였다.

    “진정해!”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에리스텔라가 발버둥 쳤다. 그녀에게 있어서 황제가 망가진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도 끔찍한 일이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가 너를 쓰러트릴 거니까.”

    하인리시온이 강경하게 나오자 그제야 에리스텔라가 행동을 멈췄다.

    “감히 폐하를 흑마법으로 세뇌시켰어! 그걸 내가 이제야 알게 됐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불끈 쥔 주먹.

    지금껏 에리스텔라의 분노를 일으킨 사건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비할 바 못 됐다.

    주체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순수한 분노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절대로 가만 안 둬.

    “너 방금 무슨…… 설마 폐하께서 흑마법에 당하신 거였나.”

    하인리시온은 그제야 그녀가 왜 이토록 흥분했는지 알아차렸다. 예상 못 한 상황에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자신이 혼란스러워하면 안 되었기에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에리스텔라의 분노에 공감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 냉정해져야지.”

    “…….”

    “일단 마음을 가라앉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잖아.”

    하인리시온은 지독하리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던 에리스텔라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열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황제에게 위해를 가한 이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황제를 흑마법의 고리에서 끊어 내는 것. 그래서 온전한 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분노와 복수보다 먼저였다.

    하지만…….

    “왜 나는 지금 이 모양일까. 평생 잘난 척만 하면서 살았는데, 정작 중요할 때는 이 꼴이라니.”

    에리스텔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녀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멍청이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하필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없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무력감이었고 동시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욱 괴롭고 끔찍했다.

    ***

    아직은 에리스텔라가 어렸던 시절.

    어린 에리스텔라는 후원에서 가족들과 놀다가 자신이 새로 터득한 마법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가족들은 언제나 감탄하며 에리스텔라를 자랑스러워했다.

    대단하다는 듯 손뼉을 치고 엄지를 치켜세워 줄 때마다 에리스텔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 아빠. 오빠까지 나만 믿어요! 내가 전부 지켜 줄게요!”

    에리스텔라의 당당한 포부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에리스텔라만 믿겠다며 아주 든든하다고 한마디씩 얹었다.

    “나중에 오빠가 황제가 되면 아무도 못 건드리게 내가 더 강해질게!”

    “나는 아무래도 동생 덕을 가장 많이 보는 황제가 될 모양이다.”

    “혹시 싫어?”

    “무슨 소리야. 우리 동생을 모시고 살아야지.”

    “히히히.”

    신이 난 에리스텔라가 오빠의 등에 폴짝 올라탔다. 그렇게 미래를 약속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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