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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7)화 (57/123)

57.

사실 이번 기부회의 배경이 된 전쟁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전쟁까지 갈 일이 아니지 않았나요.”

“협상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진행돼서 깜짝 놀랐어요.”

“승리해도 제국에게 별 이익은 없잖아요.”

“제가 들은 게 좀 있는데…….”

귀족들이 참전한 기사들의 가족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이번 국경에서의 전쟁은 황제가 무리하게 밀고 나간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 기부회에서 황제를 향한 주목도가 여러 의미로 남달랐다.

에리스텔라도 노렌트 지역의 분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실종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질 거 같지는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는 했다.

“근래 들어 폐하의 귀가 닫혀 있으니 답답할 뿐이에요. 부디 기부회라도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여기저기 반발이 많아서 오늘도 걱정되기는 하네요.”

“이번에 억지로 기부하려니 물건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지 뭐예요.”

“저도 창고에서 겨우 하나 골랐어요.”

그러다 보니 기부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소극적이었다. 이대로라면 기부회가 시작하자마자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어쨌거나 해야 하는 전쟁이라면 적어도 이곳에 온 가족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도록 해야지.’

에리스텔라는 이 기부회가 이대로 가라앉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회장의 귀족들은 불만을 속닥거리거나 다른 목적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었다.

기부회는 모든 신분이 참석할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계급은 낮지만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신흥 귀족 또는 귀족이 아니나 막대한 부를 지닌 상인들이 인맥을 넓히기 위해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명문가이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쇠락해 가고 있는 귀족들 역시 자신의 돈줄이 되어 줄 이들을 물색하기도 했다.

결국, 기부회라는 취지는 명목일 뿐 각자의 이익이 첨예하게 얽힌 자리였다.

역시나 홀 한쪽에서는 이미 근래 가장 소문이 요란한 신흥 귀족을 둘러싼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최근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는데, 제가 들은 소문이 사실인 건가요?”

“하하. 벌써 들으셨습니까.”

“무척 대단한 사업이라던데 지금 알려 줄 수 없습니까?”

“하하. 곧 발표할 겁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사람 안달 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하여튼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니 대단합니다.”

“이 또한, 제국을 수호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겸양하는 척하면서도 재력을 과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겠지요.”

“이거 아무래도 기부회의 주인공은 디아클렌 자작일 듯합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요.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화기애애하지만 가식적인 웃음소리.

기부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 두각을 드러내고는 했었지만, 디아클렌 자작은 왠지 심상찮아 보였다.

에리스텔라가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한 명 있네. 기부회의 분위기를 전환시켜 줄 사람이.’

이번 기부회의 또 다른 파란이 등장했다.

“정말로 왔네요. 이번에 공연한다지요.”

“황실과의 관계를 회복한 걸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 반대죠. 완전히 인연이 끊어졌으니 황실에서는 신경 쓰지 않겠다 했답니다.”

“샬롯은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기어코 참석하는 건가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고작 공연 따위를 하겠다고 나서다니. 어쩌다 황실에 저런 수치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샬롯이 나타나자마자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이 이토록 폭발적인 것은 샬롯이 황실 방계로서의 지위를 모두 버리고 떠난 후로, 황실 관련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샬롯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더욱 당당하게 하인리시온을 향해 걸어왔다.

“재능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귀한 기부지요. 오늘 기부회에서 최고액을 찍는 사람은 분명 저일 거랍니다?”

방금 샬롯의 공연을 싸구려 취급하는 이에게 반박하는 말이었다.

순간 그 말을 했던 귀부인은 입을 틀어막으며 긴장했지만, 샬롯은 그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샬롯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허풍이 아닌 사실이 될 것이다.

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끝없이 땀을 흘리며 노력했을 테니까.

“분명 그럴 겁니다. 제가 마땅한 값을 치를 테니까요.”

“이런. 그런 말을 들으려 한 건 아닌데. 그래도 값을 치러 주신다니 사양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출정하는 이들을 위한 돈이니 한 푼이라도 더 받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물론입니다.”

샬롯과 하인리시온의 대화가 어느덧 주변 분위기와 반전되었을 때였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2층의 문을 바라봤다.

에리스텔라는 황제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한 눈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는 어느 모로 봐도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었다.

어쩐지 쓰러질 것 같은 황제의 모습에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2층에서 아래를 향해 본격적인 행사를 알리는 연설을 시작했다.

“국방은 언제나 견고해야 하며 국토는 곧 힘이니 제국의 일원이라면 각자의 역할을 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과 가족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일반적인 이전까지의 연설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가 아는 황제가 말할 법한 내용 또한 아니었다.

연설이 이어질수록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어두워질 때였다.

어느 한 가족의 일원이 갑작스럽게 황제 앞에 나섰다.

“폐하.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절박한 몸짓으로 아무리 애써도 닿지도 못할 황제를 향해 손을 뻗으며 간절하게 목놓아 외쳤다.

“국경에 나가 있는 아들의 생사가 확인이 안 됩니다! 부디 제 아들의…….”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기사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황제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호소하는 가족을 향해 검을 겨눴다.

벌레를 보듯 경멸스러운 시선에 장내가 싸늘해졌다.

“치워라.”

아무래도 뭔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가족이 절박하게 도와달라 외쳤지만, 황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관심을 끊은 채 연설을 마무리했다.

“모두 노렌트로 가는 기사단을 위해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맙소.”

기부회의 본질을 퇴색시키는 행동. 게다가 숨기지 못한 황제의 무관심한 태도까지.

정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을 짓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삭막할 뿐이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오빠…….’

에리스텔라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황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당장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제가 막대한 기부금을 내겠다는 선언으로 연설을 끝맺음과 동시에 본격적인 기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많은 기부가 이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물건들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수 있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진행자가 나름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했지만 기부회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황제의 기부금 액수가 이번에는 모두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귀족들의 참여도도 낮아지게 된다.

당연히 기부회에 모이는 금액 역시 줄어들 것이고, 그건 곧 군비금이 적어진다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전쟁을 해야겠다면 군자금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전환점이 필요했다.

하인리시온은 침체된 분위기를 띄우고자 직접 나서려고 했으나 의외로 먼저 그 역할을 한 것은 디아클렌 자작이었다.

“이번에 디아클렌 자작께서 특별한 물건을 기부하셨습니다.”

디아클렌 자작의 이름이 언급되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디아클렌 자작은 진행자의 소개도 마다한 채 직접 나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제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제품입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은 투명한 유리구슬이었다. 구슬 안에는 마치 방금 피어난 꽃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벚꽃잎들이 살랑살랑 흩날리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물건이긴 했으나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접했을 고위 귀족들의 눈에는 그저 조금 특이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표정에 실망이 어리자 디아클렌 자작은 자못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구슬의 아래쪽에 작은 장치를 끼워 넣었다.

“이 벚꽃이 특별한 이유를 지금 보여 드리죠.”

그 순간 연회장이 갑자기 유리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온 것처럼, 구슬 안에서 흔들리고 있던 벚꽃잎이 온 연회장을 휩쓸었다.

벚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황홀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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