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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6)화 (56/123)
  • 56.

    에리스텔라가 부탁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소니아의 태도를 보아하니 나름 원하는 내용을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냈을 때였다.

    “잠깐만.”

    에리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물러나 주었던 하인리시온을 불렀다.

    “같이 듣자. 너도 알아야지.”

    “……그래.”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과 함께 소니아가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

    “네.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려 드릴게요.”

    소니아와 에리스텔라 그리고 하인리시온이 다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황궁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거 같아요.”

    소니아가 만난 사람은 황제궁에서 일하는 시종이었다.

    이전에, 소니아가 도움을 준 적이 있어서 시종은 그녀를 무척이나 따랐다.

    “특히, 황제 폐하의 공식 일정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해요. 참석하더라도 이른 시간에 자리를 뜨고요.”

    “확실히 최근 폐하께서 그런 경향이 있기는 했지.”

    하인리시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중들 사이에서…… 황제 폐하께서 좀 달라지신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해요.”

    “달라지셔?”

    “네. 그런데 그게 좀 애매해서…….”

    그는 뭔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며 망설였지만, 이내 황궁 내에 흐르는 긴장감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황궁 전체가 긴장하고 있어서 분위기도 경직되어 있고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서로를 경계하고 함부로 실수를 보여서는 안 되는 분위기.

    에리스텔라는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궁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황제가 공공연하게 에리스텔라를 혐오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두문불출하지는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확실히 뭔가 이상 징후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오라버니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데.

    그때 황궁 연회에서는 얼굴만 비치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다.

    “황제가 직접 참여하는 일정이 없을까.”

    “그렇지 않아도 곧 있다고 해요.”

    “정말?”

    마침 잘 됐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을 때였다.

    “이제 곧 있을 기부회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하인리시온은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곧 노렌트 지역의 전쟁에 출정하기 전에 그곳에서 기부회를 엽니다.”

    “확실히 거기서는 황제가 주도해야 하니까.”

    기부회.

    그건 단순한 자선회가 아니었다.

    “맞아. 나도 그때마다 가장 앞에 나서서 참여했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제국을 수호하는 상징이었기에 기부회 때마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었다.

    전쟁이 잦은 제국.

    출정하는 기사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념하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기부회였다.

    이 자리는 황제라고 해도 불가피한 사유가 아닌 이상 함부로 불참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기부회만큼은 황제가 나설 것이다.

    “그럼 결정이 났네.”

    거기서 제대로 오라버니를 확인해 보자. 도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직접 확인해 보는 거다.

    제국의 황제가 과연 여전히 황제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

    기부회는 여러 귀족들이 기부한 귀중품을 경매에 올리고 서로 마음에 드는 것들을 낙찰받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자리였다.

    물론, 수익금은 모두 기부되었다.

    특히나, 전쟁터로 보내는 지원금이기에 누가 기부한 물건이 얼마에 팔렸는지 순위가 매겨지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항상 가장 높은 금액이 나오는 순위에 에리스텔라 황녀와 하인리시온이 빠지지 않았었다.

    “뭘 기부할 거야?”

    “글쎄. 고민해 봐야지. 네가 한번 골라 보든가.”

    지금까지 하인리시온은 주로 가치가 높은 보석이나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자체 제작하는 변형 마력석을 기부하고는 했다.

    그러니 이번에 에리스텔라에게 물건을 골라 보라고 한 건 아무것도 못 하는 그녀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다.

    “나는 엄청 비싼 걸 고를 텐데?”

    에리스텔라가 설레는 얼굴로 눈을 번뜩이는 것은 알지 못한 채로.

    “상관없어. 어차피 그러기 위한 자리니까.”

    “흐음. 좋아. 그럼 진짜 내가 고른다?”

    하인리시온은 얼마든지 그러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리스텔라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하인리시온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걸 골라야지. 에리스텔라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하인리시온의 침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대체 뭘 고르려고 저기까지 찾아보는 거지?

    슬슬 불안감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한참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찾아보던 에리스텔라가 뿌듯한 얼굴을 하고서 뭔가를 하인리시온 앞에 내밀었다.

    동시에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또르르.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에리스텔라를 향해 물었다.

    “……장난하는 거지?”

    “아니. 진짜로 이걸 기부해.”

    에리스텔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대체 이게 무슨…….”

    하인리시온은 골머리가 아팠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설마 이런 걸 고를 줄이야.

    처음부터 이걸 떠올렸던 건가. 하인리시온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에리스텔라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괜히 골라 보라고 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그냥 무를까. 근데 이건 절대 안 된다고 하면 에리스텔라가…….

    반응을 떠올리니 끔찍했다.

    얼마나 비아냥거릴지 눈에 선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하인리시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굉장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수없이 갈등하면서.

    그건 다름 아니라, 하인리시온의 어릴 적 애착인형이었다.

    어릴 때 만났던 여우를 잊지 못해서 하인리시온이 직접 손바느질하면서 만들었던 여우 인형.

    그리고 조금이라도 뜯어지거나 얼룩이 묻으면 직접 고치고 손빨래를 하면서 아끼고 또 아꼈었다.

    그뿐 아니라, 어린 에리스텔라가 다른 인형으로 사 줄 테니까 버리라고 할 때는 눈물까지 보였던…… 이제는 그만 잊고 싶은 기억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이걸 대체 어디서 찾은 거야.’

    하인리시온이 한숨을 삼킬 때였다.

    “저어기 서랍에 있던데? 그것도 맨 위 칸.”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더니 하인리시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맞다. 거기에 있었다.

    몇 번이나 버리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꾸만 망설여져서 결국, 거기에 넣어 두고 방치 중이었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구나.

    “마음대로 해.”

    결국, 하인리시온은 자포자기하며 에리스텔라의 뜻에 맡겼다.

    “그나저나 정말 자정이 넘을 때까지 있을 거야?”

    “그래야지.”

    기부회는 이른 저녁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기부회에 참석해 자정이 넘은 시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하지 마.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 거지만 만약 들키더라도.”

    후후.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 방법이 있지.”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넘쳤다.

    하인리시온은 확신했다. 분명 에리스텔라가 가지고 있다는 방법은 자신이 기대하는 치밀하게 짜인 묘책은 아닐 것이다.

    아마 황당하고 기괴한 괴책이겠지.

    “그리고 하인리시온. 너도 알잖아. 이번 폐하의 상태를 꼭 확인해야 하는 거.”

    “…….”

    방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던 장난기 어린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 흑마법에 연루되어 있는 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지?”

    바로 황제파의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에리스텔라도 하인리시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파의 귀족들에게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우연이 아니라면?

    그럼 그들의 연결고리 끝에는 누가 있을까.

    ‘……황제.’

    그러니 위험해도 황제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의 마음 한편에는 황제이자 오빠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혹시 그의 신변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야 했다.

    “만약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도울게.”

    ***

    기부회는 일반인들도 볼 수 있도록 황궁의 오픈 홀에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다른 화려한 황실 연회들에 비해 최대한 많은 이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친근한 분위기로 조성하고는 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었으며, 노렌트 지역으로 출정하는 기사단의 가족들도 초청되었다.

    가족들이 기부회를 보면서 슬픔보다는 자긍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취지였다.

    하지만 이번 기부회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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