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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5)화 (55/123)
  • 55.

    ***

    후원에 있는 분수대 앞.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여우의 모습으로 하인리시온과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 황녀의 모습으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 있어도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을 정도로 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동안 하인리시온과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황녀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이렇게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거리감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에리스텔라가 분수대 안에 다리를 넣고 첨벙첨벙 장난을 치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한 번 잃어 봐야 소중함을 아나 봐.”

    그야말로 한순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속은 여전히 나인데, 나일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러웠다.

    “전부 당연한 것들뿐이었는데…… 지금은 전부 엄청 소중하고 지키고 싶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보니 더 확실해졌다. 그동안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걸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지.

    다 가졌으니 다른 거 하나쯤은 없어도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철없는 생각이었는지도.

    여우가 되어 보니 에리스텔라가 포기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도 하인리시온은 모르겠지. 그저 자신의 혼잣말이었다.

    “그러게. 곁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하인리시온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공감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지키고 싶은지 너무 뒤늦게 알게 되더라.”

    “어……?”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하인리시온을 본 순간, 움찔했다.

    서로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래서인가. 왜 하인리시온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지.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자신도 모르게 하인리시온을 빤히 쳐다봤다.

    그 상태로 그의 멋진 모습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이러니까 반하지.’

    에리스텔라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절대 고백 못 해.’

    맞다. 사실 에리스텔라의 첫사랑은 하인리시온이었다.

    그리고 이어지기도 전에 포기한 마음이기도 했다.

    너는 나한테 언제나 그림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내 첫사랑이 너였다는 걸.

    에리스텔라는 끝까지 숨길 것이다.

    그를 바라보며 오래전 정리한 줄 알았던 마음을 떠올렸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아무렇지 않게 에리스텔라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실수였다.

    그동안 여우인 모습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여우를 들어 올리듯이 에리스텔라를 향해 손을 뻗은 거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에리스텔라도 당황했다.

    “그런데 네 첫사랑은 대체 누구였어?”

    당황한 하인리시온이 화제를 바꾸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내뱉자마자 후회했지만.

    “아니, 이건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던 에리스텔라가 입을 어버버 하더니-결국.

    딸꾹.

    ‘와, 갑자기 뭐야? 깜짝 놀랐잖아.’

    에리스텔라는 너무 깜짝 놀라서 얼굴이 완전히 익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말해 버릴 뻔했다. 설마 이런 걸 노린 건 아니겠지.

    정신 차려. 에리스텔라. 절대 말하면 안 돼. 정신…… 딸꾹.

    “!”

    뭐야. 미쳤나 봐. 딸꾹.

    차라리 여우 모습이 낫지. 딸꾹. 딸꾹.

    으아, 미치겠네. 딸꾹.

    제발 그만 좀 해라! 따알꾹.

    에리스텔라의 딸꾹질은 끈질겼다. 도통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아 결국 그대로 주저앉아서 숨을 참고 가슴을 콩콩 때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딸꾹.

    서로 더 민망해졌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그만 돌아갈까?”

    “……응.”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색함을 유지한 한 뼘의 거리를 두고서.

    서로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건 이전과는 다른 의미였다.

    서로 마주보기 싫어서 외면하는 게 아니라 눈이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부끄러워서.

    ***

    침실 앞에 소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하인리시온과 함께 다가오는 에리스텔라를 발견하고는 그저 멀뚱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소니아는 이미 언질은 받았지만 에리스텔라 황녀로 돌아온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먼저 들어갈게.”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하인리시온이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러고 나니 복도에는 에리스텔라와 소니아 단둘만 남았다.

    소니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오랜만에 뵈어요. 전하.”

    고저 없이 그저 담담한 목소리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응. 반가워. 소니아.”

    그래서 에리스텔라도 웃으며 화답했다.

    그 순간, 내내 무덤덤해 보였던 소니아의 얼굴이 무너졌다.

    “……꼭 어제 봤던 거 같네요.”

    소니아의 목소리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떨리고 있었다.

    결국, 소니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소니아. 너 울어?”

    소니아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소니아가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처음 본 에리스텔라가 깜짝 놀라며 다가갔을 때였다.

    “아뇨. 안 울어요.”

    소니아가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며 언제 그랬냐는 듯 부정했다.

    방금까지 분명 글썽이던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가 있었다.

    “제가 왜 전하 때문에 우나요. 저 그렇게까지 전하를 생각하지 않아요.”

    몹시 단호하게.

    ‘거참. 걱정한 사람 민망하게.’

    에리스텔라가 소니아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부끄러운 거 못 견디는 건 여전하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인 건데.

    방금까지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소니아를 보니 단번에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

    깜박해 버렸네.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는 아침 일찍 달려와 상황을 알게 된 샬롯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알려 주는 거야!”

    “아직 낯설어서 적응 좀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다시 여우 모습으로 돌아와서야 나한테 알렸다는 거야?”

    샬롯의 기세가 무서워서 하인리시온도 눈을 피하고 있었다.

    “다음에 보러 와.”

    “무슨 소리야. 이대로 가면 나 아무것도 못 해.”

    “그러면?”

    “당연히 오늘 여기서 기다려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갈 거야.”

    “…….”

    이런. 큰일 났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는 샬롯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샬롯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걸 보니 말리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샬롯은 그대로 눌러앉아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으며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인리시온은 이미 샬롯을 피해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그렇게 에리스텔라와 소니아가 샬롯의 무시무시한 압박을 받으며 한참을 기다린 끝에 시곗바늘이 드디어 정각을 가리켰다.

    “지금인가?”

    샬롯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할 때였다.

    여우 한 마리가 있던 자리에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급조해 준비한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에리스텔라가 샬롯을 쳐다보고 있었다.

    “…….”

    “이렇게 보니까 별로 안 반가운데?”

    “뭐……?”

    “그사이에 나이라도 먹었으려나 했는데, 그대로네?”

    샬롯이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럴수록 에리스텔라는 황당함에 입술이 벌어지는데, 샬롯은 자신이 할 말에만 집중한 채 이어 나갔다.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됐어. 이제 돌아갈게.”

    “이대로?”

    샬롯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너무나 시원하고 가벼운 발걸음에 에리스텔라는 이미 턱이 빠질 기세였다.

    그토록 난리를 치더니 갑자기 돌변하는 태도가 황당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익숙했다.

    ‘샬롯이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어쩔 뻔했어.’

    분명 낯간지러워서 두드러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해 줘야 하는 사람이 있었네.

    처음 여우가 되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오롯이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셋이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에 대한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커졌다.

    ***

    자정부터 아침이 오기 전 여섯 시까지.

    에리스텔라는 하루에 여섯 시간 동안 원래 모습으로 변하는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원래 모습일 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대공가의 후원 중 일부 출입을 제한하며 마법으로 결계까지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에리스텔라는 자정이 되어서도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대신 새벽 내내 움직이다 보니 오후에 여우의 몸으로 낮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에리스텔라가 오늘만큼은 잠들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자정이었다.

    게다가 볼일이 있어 오후에 외출을 했던 소니아가 자정이 되자마자 에리스텔라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전해 왔다.

    “오늘 황궁에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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