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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4)화 (54/123)
  • 54.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뜬 하인리시온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다가가는데 에리스텔라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침대 위에 하인리시온의 옷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설마…… 저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에리스텔라가 아직도 원래 모습인지 아니면 여우로 돌아왔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고민 끝에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허물처럼 늘어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살짝 들어 올렸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없겠지. 자신도 모르게 안심하며 옷을 정리하기 위해 완전히 들어 올리는데.

    ‘뭐가 걸리는데?’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방금 살짝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방금 들쳤던 옷가지를 좀 더 끌어올려 아래쪽을 자세히 보는데, 셔츠 안쪽에 여우가 몸을 웅크리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아아…….”

    옷을 잡고 있던 하인리시온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뭔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로.

    ***

    하인리시온은 날이 밝자마자 세리안을 다급하게 불렀다.

    “옷을 좀 만들어야겠어.”

    “외출복이나 연회복을 지으시는 건가요?”

    “아니. 필요한 건 내 옷이 아니라 여우 옷이야.”

    하인리시온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찾아낸 방법을 바로 실행 중이었다.

    여우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지난밤 일이 떠올라 하인리시온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애써 뻔뻔한 낯으로 요구했다.

    “여우님이요?”

    세리안이 갸우뚱하자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책상 위로 올라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여우가 옷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말야. 좀 만들어 주면 어떨까 싶어서.”

    “어머? 너무 좋은 생각이시네요!”

    세리안이 이상하게 생각할 경우를 대비한 대답을 생각해 두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너무도 좋아했다.

    “어떤 게 좋을까요. 제가 동물 옷은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열심히 연구해서 만족할 만한 옷을 만들어 드릴게요.”

    “세리안. 여우 옷은…… 보통 드레스처럼 만들어 줘.”

    “드레스요?”

    세리안에게 지시를 하는 동안 하인리시온의 눈동자가 몇 번이나 흔들렸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여우의 옷을 만들어 마법을 걸어 놓는 것이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여우가 입고 있던 옷이 그대로 커져서 에리스텔라가 입을 수 있도록.

    세리안에게 말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냈지만 떠오른 건 없었다.

    “……여우가 그런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자괴감이 밀려오는 하인리시온이 포기하듯이 말하는 순간.

    짝!

    세리안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전하.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수많은 드레스를 만들던 세리안이 하인리시온의 옷만 만들었으니, 손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세리안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제가 솜씨를 제대로 뽐내 볼게요.”

    세리안은 벌써부터 머릿속에 수많은 구상이 떠올라 들떠 있었다.

    “그래. 여우가 좋아할 만한 옷으로 넉넉하게 만들어 줘.”

    “네. 알겠습니다. 호호호.”

    의욕에 가득 찬 세리안과는 달리 하인리시온은 반쯤 체념 중이었다.

    지난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다. 수많은 변수를 계산했었지만 그런 상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설마 그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하인리시온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순간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깜깜했다. 허둥지둥 상황을 수습했지만 결국 뜬 눈으로 밤새우고 지금.

    하인리시온은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세리안은 한껏 신난 채로 여우를 향해 눈을 빛냈다.

    “여우님. 그럼 저랑 가실까요?”

    ‘좋아!’

    어느새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지난밤 소동은 이미 지나간 일. 에리스텔라는 앞으로 생길 드레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세리안이 앞발을 잡으며 여우를 안아 들었다.

    “사실, 제게 여우님을 떠올리면서 스케치 해 놓은 디자인이 있거든요.”

    방금까지 들떠 있었던 에리스텔라가 순간 뜨끔하며 긴장하지만, 세리안은 그런 여우의 변화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네요. 호호호.”

    콧노래를 부르며 세리안은 자신 있게 디자인 스케치들을 쫙 펼쳤다.

    “참 이상한 일이죠. 평생 사람이 입는 옷만 만들었는데, 여우님을 보니 영감이 마구 떠오르더라구요.”

    ‘당연하지. 내가 원래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존재였는데!’

    그녀가 황녀였을 때, 에리스텔라를 보고 떠올랐다면서 드레스나 티파니는 물론이고 온갖 장식품을 선물 받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에리스텔라가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멋지게 한 바퀴 돌면서 좋아했다.

    “여우님.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한번 골라 보시겠어요?”

    세리안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훑어보던 에리스텔라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고개를 번쩍 든 에리스텔라는 할 수만 있다면 양 앞발로 엄지를 치켜세워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와. 역시 세리안 대단해!’

    “마음에 드시는 거 같네요.”

    비록 에리스텔라의 말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만큼은 세리안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하지. 이 중에서 뭘 골라야 할지가 고민될 정도로 엄청 맘에 쏙 들어!’

    에리스텔라가 행복한 고민에 빠져 드레스 디자인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황녀일 때도 이렇게까지 맘에 드는 드레스는 없었던 거 같은데. 뭐가 좋을까.

    한참을 이것저것 보던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척 들어서 단 하나의 드레스를 콕 집어 가리켰다.

    ‘나는 이거!’

    에리스텔라가 가리킨 것은 정교하게 무늬를 수놓은 레이스가 장식된 하얀색 드레스였다.

    새하얀 드레스의 곳곳에 자수처럼 엮인 보석 덕분에 섬세하면서도 몹시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거 좋아.’

    “화려한 디자인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세리안은 단번에 에리스텔라의 취향을 알아차렸다.

    “좋아요. 제가 여우님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를 더 많이 만들어 드릴게요!”

    ‘세리안만 믿을게!’

    “그럼 치수를 한번 재 볼까요?”

    세리안은 여우의 치수를 꼼꼼하게 재고 어울리는 원단을 가져와 대며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영감이 떠올라요.”

    ‘그지? 내가 모델이 좋아서 뭘 입어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거든.’

    에리스텔라가 뿌듯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리안. 나는 밝은 색깔도 잘 어울려. 저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에리스텔라는 세리안의 옆에서 열심히 요구 사항을 말했다.

    알아들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에리스텔라는 눈을 빛내며 세리안을 향해 열심히 어필했다.

    그리고 세리안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리스텔라가 눈여겨보는 것들을 귀신같이 집어 들었다.

    그렇게 여우는 세리안의 방에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나왔다.

    침실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던 하인리시온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직접 찾아가서야 겨우.

    ***

    처음 변했던 날에는 이후 어떤 증상들이 나타날지 확인하느라고 방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했다.

    갑자기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는지.

    에리스텔라 본래의 모습으로 유지가 가능한 시간은 자정부터 동이 트기까지.

    여섯 시간.

    황녀 에리스텔라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원래 이게 나인데…… 낯선 느낌이 들어.’

    특히, 이게 얼마 만의 두 발 산책일까.

    에리스텔라가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보이는 뽀얀 발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다시는 이렇게 못 걸을 줄 알았는데.

    사뿐하게.

    한 번 뛰었다. 폴짝.

    이번에는 가볍게 손을 뻗어 정원에 있는 꽃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며 꽃들이 춤을 추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특히나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 한해서 마력도 회복되었다.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되나.’

    절반이라고 해도 다른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온몸에 힘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좋다. 너무 좋아!

    에리스텔라가 빙빙 돌았다. 이곳이 무대로 변한 듯한 기분에 취해 있을 때였다.

    에리스텔라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하인리시온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있어.”

    혹시라도 지금의 에리스텔라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가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은 따로 분리해 놓았다.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 앞으로 다가가서 팔을 쭉 뻗었다.

    “하인리시온. 나 어때?”

    에리스텔라가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예전 모습이랑 달라진 거 있어? 그대로야?”

    “…….”

    “머리카락이 좀 긴 거 같은 기분도 들고. 발이 좀 커졌나 싶기도 하고. 뭐 내 착각이겠지만. 네가 보기에는 어때?”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니까.

    그녀가 실종되기 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지난 시간들이 후회가 됐다.

    “시온?”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물음에 맞는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대신…… 하인리시온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지금 좋아 보여.”

    그게 최선이었다.

    흐응. 에리스텔라가 활짝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에리스텔라가 다시 한번 가볍게 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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