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돌아가야지. 원래 나로.’
하인리시온이 마법 주문을 그렸다. 그 주변으로 마력석을 각 위치에 올려놓고 마법을 시전했다.
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에리스텔라를 감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에리스텔라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서 아래를 내려 봤다. 자신의 몸을. 그런데.
……어?
에리스텔라는 상상했었다.
가느다라면서 긴 손가락을 따라 올라가면 팔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돌아오지 않을까. 그랬는데…….
‘그대로야.’
에리스텔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대로지?’
실패인 건가.
[괜찮아. 이렇게 시도라도 해 본 게 어디야. 다음에는 될지도 몰라.]
에리스텔라는 씩씩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처음부터 잘될 수는 없는 법.
“바로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닌가 보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희귀한 사례를 연구한 결과라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분명 달라지는 게 있을 거야. 조금 더 기다려 보자. 그래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 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에리스텔라도 동의했다.
앞으로 그 마법에 보완점을 찾아보고 다시 시도해 보면 된다.
그러니 당분간은 지금처럼 여우로 지내자.
***
하지만 두 사람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무 변화도 없이 흘러간 하루였다. 그런데 정확히 오늘과 내일의 경계선이 맞닿는 시간.
자정이 되는 순간 에리스텔라에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뭔가가 변하는 듯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더니…… 어느새 여우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돌아왔다. 원래 모습으로.
여우가 아닌 황녀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하인리시온이 말한 시간의 제약이라는 게 이거였나 보다.
마법이 무효화가 된 게 아니라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에리스텔라의 금빛 눈동자를 본 순간 하인리시온이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여우의 발바닥 젤리가 아니라 길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너…… 돌아온 거야?”
에리스텔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러다 거울을 보려고 돌아서는데.
“그런가 봐. 우와 나…….”
그때였다. 스르륵-에리스텔라의 어깨 위에 걸려 있던 하얀색 천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드러나는 건…….
아, 맞다.
에리스텔라가 급하게 천을 다시 어깨 위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나 옷부터 좀…….”
“!”
놀란 하인리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당황스러웠는지 이내 질끈 감았다.
그제야 에리스텔라가 이불보로 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우의 몸에서 인간이 되니 그녀는 당연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자, 잠깐만…….”
하인리시온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지둥했다.
“입을 만한 옷이…… 금방 가지고 올게.”
하인리시온이 옷을 가지러 도망치듯이 방을 나섰다. 그 후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지만.
‘왜 안 오지?’
어째서인지 하인리시온이 바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투덜거리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똑똑-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다른 사람인가? 어떡하지?
숨어야 하나 싶어 소파 뒤로 몸을 숨기려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이 어색해하며 들어왔다.
“깜짝 놀랐잖아. 네가 왜 노크를 하면서…….”
그런데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고개를 돌린 채 옆걸음질하며 가져온 옷을 내밀었다.
“일단 이걸로 입어.”
에리스텔라가 팔만 쏙 빼내어 옷을 건네받아 펼쳤을 때였다.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봐도 옷이 뭔가 이상했다.
“이거 드레스가 아닌데?”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쳐다봤다. 드레스가 아니라 간편한 활동복이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한테 잘못 준 거 같아.”
그러니 다른 걸로 갖다 달라는 말이었는데 하인리시온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은 순간 하인리시온의 입술이 어색하게 벌어졌다.
“내 드레스룸에는 이거밖에 없어서…….”
“어……?”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하인리시온에게서 다시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옷으로 향했다.
하인리시온의 옷이었다.
“갑자기 드레스를 가져오라고 시키기도 그래서. 급한 대로 내 옷이라도 가져왔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에리스텔라도 뒤늦게 깨달았다.
갑자기 에리스텔라 황녀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 주면서 옷을 가져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인리시온 역시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늦게 돌아온 것이다.
“불편해도 그거라도 입어 봐.”
에리스텔라가 한눈에 봐도 커 보이는 하인리시온의 옷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건 진짜 어쩔 수가 없네.
“일단 돌아서 있어.”
“어, 어…….”
이미 돌아서 있던 하인리시온이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더욱 열심히 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조심스레 천을 살짝 내렸다. 그리고 펼친 옷을 보며 망설이는 것도 잠시, 에리스텔라는 정신없이 옷을 입었다.
“이제 돌아서도 돼.”
에리스텔라의 신호에 몸을 돌린 하인리시온은 그대로 굳었다.
넉넉한 것을 넘어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커다란 셔츠와 허리 때문에 몇 번이나 접어서 간신히 고정시킨 바지.
하나같이 크고 헐렁한 옷은 입었다기보다는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에리스텔라가 손도 감춰 버린 옷소매를 접으려고 할 때였다. 한 손으로 하니 아무래도 어설픈데.
어느새 다가온 하인리시온이 아무 말 없이 스윽 소매를 단정하게 접어 주었다.
“…….”
하인리시온의 손과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리스텔라가 반대편 팔을 뻗었다.
“이쪽도.”
하인리시온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반대편 팔을 뻗었다.
하인리시온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쓸고 있는 바지도 접어주었다.
하인리시온이 애써 생각해 자신이 소년 시절 입던 옷을 가져왔지만, 그조차도 에리스텔라에게는 너무나 컸다.
헐렁헐렁.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돌았다.
왠지 입안이 마르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그걸로 참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응.”
드레스를 준비하는 것 자체는 날이 밝는 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단순한 방식으로는 부족했다.
어떤 조건에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항상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그게 에리스텔라를 위한 거라는 사실도 숨겨야 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드레스를 입고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하인리시온의 눈앞이 깜깜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내일까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해.’
하인리시온은 필사적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당장 지금은…….
“이제 어떻게 할래?”
하인리시온이 오랜만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에게 물었다.
“좀 나가 보고는 싶지만…… 혹시 다른 사람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아직은 에리스텔라 황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기는 쪽이 나았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렇게 해. 긴장하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오늘은 그만 자자.”
“응.”
두 사람이 몸을 돌리는데 똑같은 방향이었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두 사람이 잠을 자던 곳이 어디인지.
고비를 하나 넘으니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은 어떻게 해?”
그동안은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한 침대를 써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대로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
그런데 눈앞에 에리스텔라 황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전처럼 같이 잔다는 건…….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아니야.’
‘미쳤어. 어떻게 같이 자!’
다만 문제는, 이제 와서 에리스텔라의 방을 따로 마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닌 이상 지금 이 모습은 숨겨야 했다. 그러니 이 방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눈치가 오갔다. 누가 먼저 입을 여나 타이밍만 재고 있는데,
“내가 저기서 잘게.”
에리스텔라가 소파를 가리키면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하인리시온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베개를 하나 집어 들고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갈게.”
호기롭게 누웠지만 하인리시온의 긴 다리가 소파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몸을 소파에 욱여넣는 모습이 너무 불편해 보여서 에리스텔라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근데 뭐라고 하지?’
내가 키가 더 작으니까 소파에서 자겠다고?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그냥 같이 자자고? 같이 누워서 아무렇지 않게…….
‘그걸 어떻게 말해…….’
결국,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
“…….”
“…….”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적막이 감도는 밤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중간에 몇 번이나 고개를 들어 하인리시온을 힐긋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하인리시온 역시 몇 번이나 일어나 침대에 잠들어있는 에리스텔라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다 그대로 소파에 몸을 붙였다.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더디게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