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2)화 (52/123)

52.

“이곳에 와서 얼마나 사고를 치셨는지 몰라요. 그런데 또 얼마나 자주 오시는지.”

하지만 역시나.

“어우, 진짜 성격이 장난 아니었다니까.”

“올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서 말야.”

“끔찍했지. 아주.”

사람들이 모두 치를 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에리스텔라의 다른 면을 좀 봐서 혹시나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괜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하인리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스텔라가 자신이 알던 대로 제멋대로에 이기적이라는 걸 확인해서 안도한 건지 아쉬운 건지 알 수 없어 멈칫했을 때였다.

옆에서 가장 신나게 황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이가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그나저나 설마 진짜로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에이. 몹쓸 소리 하지 말게. 장례식이고 뭐고 나는 그딴 거 안 믿어. 분명 어디 살아 계실 거야.”

“그렇겠지. 내가 반년 전에 황녀 전하께서 주문하신 걸 아직도 갖고 있는데. 꼭 찾으러 오실 거야.”

“나도야. 전하께서 마시다 남긴 술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하아…… 못 뵌 지 오래되니 아주 조금 허전하네.”

“하루에 서너 번은 생각나기는 하지.”

“그러게나 말야. 에휴.”

사람들이 입을 모아 에리스텔라를 그리워하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모두 좀 전까지는 황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거참. 자꾸 오실 때는 피곤했는데. 안 계시다 생각하니…… 그립구먼.”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

그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달려왔다.

‘뭐야? 오늘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하인리시온은 불만을 토로하듯이 자신을 반기는 에리스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까 하인리시온은 알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가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보호해 준다고 해도. 에리스텔라는 아이가 위험해질 조그마한 가능성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에리스텔라라는 걸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하인리시온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져 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듯이 떠올랐다.

어린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사이에 있었던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가.

***

아이는 하인리시온이 준비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날의 진실을 모두 말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아이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그날의 이야기는 에리스텔라를 민망하게 만들 만큼 아름답고 위대하게 각색되어 있었다.

설마 하인리시온이 시킨 건가 싶었지만, 경악하고 있는 그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저 그게 아이에게는 진실인 모양이었다.

에리스텔라 황녀가 흑마법사로부터 아이를 감싸다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

파란이 일었다.

물론, 지금껏 에리스텔라 황녀의 의도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던 이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황녀의 숭고한 희생을 왜곡한 것이 되어 버렸으니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숨죽인 채 입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황궁과 귀족들을 넘어 수도로 이어서 제국 전체로 단번에 퍼져 나갔다.

소문을 더 빠르게 퍼뜨리고자 하인리시온이 몰래 손을 쓴 건 덤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제국 전체가 여러 의미로 들썩이며 소란스러워졌고 사람들은 황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했다.

황녀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는 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그로 인해 논쟁이 일기도 하고 새로운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가 있다면…… 더 이상 그 누구도 에리스텔라 황녀가 흑마법과 결탁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에리스텔라의 평판이 어찌 되었건 그녀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제국을 빛낸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사람들은 에리스텔라 황녀가 죽은 게 확실하다는 믿음까지 더해졌다.

한편, 시끌벅적한 세상과는 달리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오히려 세간의 소란에는 무관심했다. 마치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실종에 관한 문제 때문에 미뤄 두었던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제법 쌓인 보고서를 살피던 중, 뭔가를 발견한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휙 돌아보았다.

‘응? 갑자기 나는 왜?’

에리스텔라가 어리둥절해하는 것과 동시에 하인리시온의 큼지막한 손이 여우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성큼 방문을 박차고 걸음을 옮겼다.

‘뭐야? 갑자기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발버둥을 쳤지만 하인리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에리스텔라를 매섭게 노려보며 추궁하듯이 입을 열었다.

“오페라 연회에서 일어난 소동. 네가 한 짓이지?”

그가 확인한 보고서는 바로 오페라 연회에 관한 것이었다.

하인리시온은 단번에 에리스텔라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눈치챘어?]

“그런 쓸데없는 마법을 써먹는 사람은 너 말고 없으니까.”

[…….]

제길. 할 말이 없네.

에리스텔라가 침묵으로 긍정했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력이 꽤 괜찮은 수준까지 올라왔나 보네.”

[응. 네가 봐도 그런 것 같지?]

언제 눈치를 보고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들뜬 에리스텔라가 빙빙 돌며 기쁨을 마구 드러냈다.

“마침 잘됐네. 필요한 조건이었는데.”

[조건?]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어.”

마치 내일 잠깐 외출하자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래서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에리스텔라가 뻣뻣해졌다.

[정말이야?]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설마 장난은 아니지? 이런 거로 농담은 진짜…….]

하지만 하인리시온이 담담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번 해 봐야겠지만 가능할 거 같아.”

여우가 전속력으로 달려 그의 품에 쏙 안겼다.

[드디어!]

“오래전에 비슷한 사례가 하나 있었던 걸 찾았어. 그걸 아버지가 연구하고 분석해 놓았더라고.”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은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연구가로서의 성과는 그보다 더 대단했다.

그가 연구한 해법을 하인리시온이 찾아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나 뭐든 할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 대량의 마력석과 강력한 마법사.”

[어…… 그거라면……?]

“이미 둘 다 있지.”

하인리시온이 구해 놓은 대량의 마력석과 강력한 마법사인 하인리시온.

“그리고 당사자도 어느 정도 충분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몸이 마법을 감당하지를 못할 위험이 커.”

[그건 괜찮아.]

에리스텔라가 결연하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이 이상으로 마력을 흡수할 수도 있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어. 완벽한 방법이 아닐지도 몰라.”

[완벽하게는 아니라니?]

그럼 설마…… 상체만 돌아오고 아니면 눈과 코만 돌아오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그런 이상한 조합이 되는 건 아니겠지.

에리스텔라의 괴상한 상상력을 눈치챈 하인리시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아니구나. 그럼 뭔데?]

“일시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한계일 거야. 정확히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여우로 돌아오게 되겠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잠깐이라도 돌아갈 수는 있는 거잖아.]

5분만이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렇게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에리스텔라에게 하루에 일부 시간 동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고 희망이었다.

***

황녀 에리스텔라로 돌아가는 시간. 그토록 고대하던 시간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잘될까. 잘되겠지.’

에리스텔라는 기대되는 만큼 긴장되었다.

오로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 둘이서 은밀하게 준비하는 일이었다. 결국, 모든 준비는 하인리시온이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준비 다 됐어.”

하인리시온의 신호에 에리스텔라가 움직였다.

“오래 걸릴 거야.”

주문만 해도 방대한 양이었다. 하인리시온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실행하기 위해 에리스텔라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잠깐만.’

갑자기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쭉 뻗으며 하인리시온을 밀었다.

“왜 그래?”

[그냥. 잠깐만.]

에리스텔라도 이 순간에 갑자기 망설이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민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조금이라도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여우로 지낸 시간이 나쁘지 않았어.’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느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전의 외로운 생활은 완전히 잊은 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이것도 전부 끝이겠지.’

그게 조금은 아쉬울 것 같았다.

그동안 즐거웠어. 가끔씩은 이대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