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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1)화 (51/123)
  • 51.

    그날의 상황이 하인리시온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처럼 그려졌다.

    “아이의 부모도 혹시라도 잘못 연루될까 봐 겁을 먹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녀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무서워서 나서지 못하고 꼭꼭 숨어 살았지만 차마 그런 소문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먼 타지에 정착해 살고 있던 그들은 소문을 늦게 접했고 당연히 수도에 돌아오기까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늦은 것 같아 죄송하다고 후회하더군요.”

    소년은 로웬에게 그날의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에리스텔라에 대한 죄책감과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늦어진 증언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아이가 기어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게 문제였다.

    ‘너…… 내가 말하지 말랬는데.’

    에리스텔라는 아이의 등장이 못마땅했다. 아직은 안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저 아이가 위험해져. 일단은 저 아이와 가족이 안전하도록…….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지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하인리시온밖에 없었다.

    ‘하인리시온! 저 아이를……!’

    에리스텔라가 직접 부탁하기도 전이었다.

    “저 아이와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도록 해.”

    하인리시온이 로웬에게 지시했다.

    “필요한 건 모두 지원하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불상사도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하겠습니다.”

    그 말 덕분에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도 하인리시온이라면 아이와 가족을 흑마법사들로부터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할 테니까.”

    하인리시온이 아이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에리스텔라가 힐긋 곁눈질하며 하인리시온을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솔직히 이번에 많이 놀랐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그런 행동을 하실 줄이야.”

    로웬도 항간에 도는 황녀 에리스텔라를 둘러싼 소문을 믿지 않았었다. 적어도 로웬이 아는 황녀는 자신의 긍지에 반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황녀의 실종을 둘러싼 진실을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된 진실은 소문과 너무나도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황녀는 어떤 사람이었던 거지.

    처음 프루투 영지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로웬의 마음속에서 황녀의 존재에 대한 혼란이 생겨났다.

    “대체 어떤 엄청난 일이 있었던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네요.”

    그 대가로 본인의 목숨을 잃게 될 줄 알고도 한 행동이었을지. 아니면 황녀 전하시기에 괜찮을 거라고 자만한 건지.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쪽이든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로웬은 보고하면서도 마음이 경건해졌다. 더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로웬과는 달리 확인할 방법을 알고 있는 하인리시온의 반응은 달랐다.

    “……확실히 그렇지.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런 대단한 일을 했네.”

    “…….”

    “겁도 없이.”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건조하지만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하인리시온의 눈치가 보였다.

    ‘왜 저렇게 노려보지?’

    원래라면 하인리시온이 노려보면 자신도 같이 더 무섭게 노려볼 텐데 지금은 자꾸만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저 매서운 눈빛에 기세가 눌렸다.

    마치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에리스텔라는 내심 당황했다.

    ‘나 왜 쫄지……?’

    하인리시온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에리스텔라는 이상하게 어색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멀뚱멀뚱한 채로 괜히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왜 말하지 않았어?”

    하인리시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가 서운한 듯이.

    “그 아이가 걱정됐다면 내게 부탁할 수도 있었잖아.”

    ‘그건…….’

    왠지 잘 해명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에 에리스텔라가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면…… 나를 믿을 수 없었던 건가.”

    하인리시온이 혼잣말하듯이 툭 내뱉었다.

    어라.

    이대로 아무 해명도 안 하면 분명 상처받을 텐데.

    어쩌지. 어엇……?

    ‘잠깐만!’

    여우의 네 발이 힘차게 점프했다. 빠른 걸음걸이로 발걸음을 내딛는 하인리시온의 옷자락을 겨우 붙잡았다.

    ‘……멈췄다.’

    다만, 너무 급하게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들었는지 여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셔츠를 꽉 물었고, 그로 인해 네 개의 앙증맞은 발은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자정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울렸다.

    댕-열두 번의 규칙적인 소리.

    하인리시온의 셔츠를 당기고 있던 힘이 빠지고 허공에서 흔들리던 발이 땅에 닿았다.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하인리시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믿지 못한 적 없어.’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라고. 에리스텔라가 진지하게 진심을 드러냈다.

    “…….”

    그 순간이었다.

    하인리시온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분명히 마주친 것 같은 그녀의 금빛 눈동자.

    어느새 황녀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하지만 착각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여우였다. 그저 잠시 하인리시온의 눈에 황녀의 모습이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을 뿐.

    [그냥 좀…….]

    “?”

    에리스텔라가 우물거렸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저절로 앞으로 기울어졌을 때였다.

    [내가 욕 좀 먹는다고 그 아이 해명까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꼭 생색내는 거 같잖아?]

    에리스텔라의 말이 점점 더 빨라지며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나열했다.

    [별로 그런 것도 아닌데.]

    에리스텔라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앞발을 열심히 흔드는데,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민망해 죽겠어!]

    얼굴에 식은땀도 흐르는 것 같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리스텔라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

    하인리시온이 그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손가락질해도 오히려 비웃던 그녀가 지금 확실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다.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에 몇이나 더 있을까.

    그 행위에 오해란 있을 수 없는데.

    에리스텔라는 진심으로 그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자꾸만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왜 자꾸 내가 모르는 네가 보이는 걸까.”

    하인리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모르겠다. 앞으로 에리스텔라의 행동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

    하인리시온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툭. 툭. 툭.

    에리스텔라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게 이제 와서야 궁금해졌다.

    여전히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인 건 그대로이지만. 에리스텔라와 얽히면 얽힐수록…….

    ‘내가 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거 같지.’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외면하고 있었던 몇 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에 남겨진 그녀의 흔적을 찾아봐야겠다.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는 에리스텔라가 진짜 에리스텔라가 맞는지.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몇 가지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벌인 만행. 하벨링 후작 대리 폭행 사건.

    그 사건의 전말은 하벨링 후작 대리가 어린 후계자이자 하인리시온의 조카에게 벌인 학대가 원인이었다.

    또한, 하인리시온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아델라시아 선대 대공 부부의 죽음 역시도.

    그러니 지금까지 에리스텔라의 악명을 높여 주었던 사건들 역시 그 이면에는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몰랐다.

    ‘알아야겠어. 진짜 에리스텔라를.’

    ***

    하인리시온은 누구에게도 지시하지 않고 직접 움직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실종된 황녀를 찾기 위해 조사해 놓았던 기록들부터 확인하며 그녀의 행적을 찾아 나갔다.

    그러다 보니 다다른 곳은 에리스텔라 황녀가 외출할 때 시녀들을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닌다는 어느 한 장소였다.

    하인리시온은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에리스텔라 황녀의 흔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그동안 여기를 다녔던 건가.’

    예상 밖의 장소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질서 없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거리.

    수도 외곽에 빠져 있는 난전이었다.

    아무도 에리스텔라가 이곳에 출몰하는지 몰랐다니.

    “황녀 전하를 찾나 보네.”

    “……알고 있었나?”

    “알다마다요. 숨기시기야 했지만 그리 치밀한 분은 아니셔서 말입니다. 우리끼리야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죠.”

    “황녀 전하께서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다고 즐거워하시기에 모른 척해 드렸을 뿐이지.”

    “…….”

    하인리시온은 이곳에서 에리스텔라의 다른 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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