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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50)화 (50/123)
  • 50.

    그러자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로 폴짝 올라갔다.

    그리고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프루투 영지로 떠났던 로웬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마 했다.

    설마 그 아이겠어. 다른 사람이겠지.

    그러면서도 고용인들이 말하는 대로 아이의 방을 찾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설마 했던 그 아이가 맞고, 하인리시온은 아이가 이상한 대치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에리스텔라가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알아듣기는커녕 여우를 보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이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여우를 만지고 싶은지 손을 뻗어 왔다.

    ‘에휴. 겁먹지 마. 시온은 좋은 사람이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일단 아이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게 먼저지.

    에리스텔라가 아이가 내민 손바닥을 향해 머리를 살짝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이가 여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혹시 제가 안아 볼 수 있나요?”

    아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들떠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야 하는데…….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쳐다보는데 여우는 이미 아이를 향해 앞발을 뻗고 있었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 아이의 긴장은 한껏 풀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들을 수 있을까?”

    아이는 여우를 품에 안은 채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날…… 황녀 전하께서 저를 구해 주셨어요.”

    “구해 줘?”

    “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나 쓸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데…… 그날은 우연히 산에 버려진 공을 주웠어요.”

    아이는 서툴지만, 열심히 차근차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좋고 재밌어서 혼자서 멀리까지 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위축된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거기서 갑자기…….”

    아이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듯 떨림이 점점 더 거세졌다.

    “무서운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아이가 말하는 무서운 사람은 흑마법사일 터였다.

    하인리시온은 아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산에 대해서는 잘 알아서 급하게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 황녀 전하께서 오셨어요.”

    어느새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당장이라도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기세로 아이는 연신 외쳤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지금 사람들이 하는 말 전부 헛소리예요! 전하께서는…… 저만 아니었으면…… 으흐흑…… 흐어어엉……!”

    결국 소년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증언으로 황녀 전하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는 꾸역꾸역 말을 이어 나갔다.

    유일한 생존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생존자에게서 나온 그날의 진상은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이유였다.

    어째서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에리스텔라가 실종되었던 건지.

    ***

    나무와 풀들로 무성했던 공간이 어느새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에서 에리스텔라가 팔에 난 상처를 대충 수습하며 앞을 노려보았다.

    “여기도 별 볼 일 없는 조무래기일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네.”

    “그러게요. 드디어 만나 뵙네요. 황녀 전하.”

    상대는 에리스텔라에 비해 부상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진짜 정체가 뭐지?”

    “그저 마법사입니다.”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나오는 뻔뻔한 대답.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순순히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그럼…….

    “일단 붙어 보면 알겠지.”

    에리스텔라와 데클렌의 마력이 충돌했다.

    “네가 제법이기는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가 더 잘났어.”

    에리스텔라가 거만한 미소를 띠며 여유롭게 말했다.

    조금도 질 것 같지 않았다.

    뭐, 오랜만에 힘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기면 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온 힘을 끌어모으려고 할 때였다.

    이곳에 에리스텔라와 데클렌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쟤가 왜 여기 있어?’

    에리스텔라가 당황할 때였다. 하필 데클렌도 소년을 발견했다.

    제길.

    일단 저 꼬맹이를 멀리 보내야겠어.

    하지만 데클렌 역시 소년을 보면서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에리스텔라가 소년을 신경 쓴다는 걸 눈치채고 그걸 이용할 작정이었다.

    에리스텔라에게는 고민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데클렌에게 등을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에리스텔라는 돌아섰다.

    그리고 온몸을 던졌다.

    꼬맹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아…… 하…….

    어쩌지.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한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게다가 꼬맹이는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봐. 꼬맹아. 정신 차려.”

    지금 남은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꼬맹이를 멀리 이동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 후에는, 꼼짝도 못 할 거 같은데.

    “꼬맹아. 내 말 명심해.”

    “허어어엉-!”

    “여길 떠나고 나면 전부 잊어.”

    꼬맹이는 공포에 짓눌려 정신없이 울었다.

    하지만 여기서 달랠 시간은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꼬맹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흑…… 흐극…… 끅, 끄윽…….”

    꼬맹이는 겨우 울음을 참으려 애쓰면서 에리스텔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야 안전해. 알아들었어?”

    에리스텔라가 꼬맹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꼬맹이를 멀리 보내려 할 때였다.

    꼬맹이의 조그마한 손이 에리스텔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꼬맹이는 훌쩍거리면서도 힘겹게 입을 떼 물었다.

    “호, 혹시… 황녀 전… 하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까 무서운 사람이 화, 황녀 전하시라고…….”

    에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 더는 지체할 것 없이 아이를 보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아이가 사라지기 직전에 한마디만 남긴 채.

    “그것도 잊어. 이건 황녀의 명이야.”

    아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대로 사라졌다. 에리스텔라는 아이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망했네.

    힘이 쪽 빠졌다. 손에 힘도 안 들어가는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이렇게 죽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유로운 발걸음은 마치 약한 사냥감을 쫓는 맹수 같았다.

    “여기서 기척이 느껴지는데…… 어디 계십니까.”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그가 날 선 감각으로 기척을 찾는 게 느껴졌다.

    “설마 구차하게 숨어 계시기라도 한 겁니까.”

    일단 살려면 숨어야지. 구차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의 도발에 콧방귀를 끼며 더욱 기척을 숨겼다.

    “제가 찾으면 어쩌시려고요.”

    데클렌의 조롱 어린 말소리가 들려왔다.

    욱할 뻔했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그래도 다행이었지.’

    막판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마력을 끌어모아 모습을 바꿨다.

    여우로.

    다행히 데클렌은 에리스텔라를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에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에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 별수 없죠.”

    그가 아쉬운 척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제 나름대로 마지막 선물을 하는 수밖에.”

    그가 뭔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 역시 점점 의식을 붙잡고 있기가 어려웠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결국 그대로 쓰러졌다.

    ***

    모든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저 아이가 울음을 참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황녀 전하께서 아이에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로웬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말을 꺼냈다.

    “괜히 나서지 말라고. 그랬다가는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 조용히 안전한 곳으로 떠나라고요.”

    하인리시온은 그 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후에 누가 그곳을 찾아가더라도 아이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에리스텔라가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며 흔적도 남지 않게 마법을 걸었을 테니까.

    그렇게 남은 힘을 다 끌어모으고 난 뒤에 쓰러지고.

    ‘일어나 보니 여우의 몸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지.’

    그게 그날의 진실이었다. 얼토당토않은 흑마법 연루와는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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