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48)화 (48/123)

48.

“이렇게 된 이상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는다면 모두가 황녀가 흑마법과 결탁했다고 믿을 기세였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를 설득하기 위해 하인리시온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지금은 그래도 네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어.”

‘…….’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하인리시온은 귀족 사회에서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 결과, 아직까지는 존재했다.

“그래도 너는 제국의 자긍심이니까.”

황녀 에리스텔라를 아무리 욕해도 근원에는 자신들을 지켜 주는 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에이. 황녀가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해도 그럴 사람은 아니죠.”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황녀인데요.”

그러니 이건 지나친 억측이라고.

황녀의 개인적인 평판과는 별개로 제국의 수호자로서의 황녀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야. 그건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에리스텔라를 둘러싼 오해에는 온갖 가십과 억측이 보태질 것이다.

더욱더 잘 끼워 맞춰진 퍼즐처럼 소문이 다듬어지고 나면 아직까지는 에리스텔라를 지지하고 있는 이들 역시 말을 바꾸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정말 황녀가 그런 끔찍한 짓을…….”

“어쩌면 비정상적으로 강하던 마력이 흑마법과 관련된 게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제국의 황녀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죠.”

아마 그런 식으로 흘러가겠지.

아무도 방어해 주지 않고.

그 누구도 대신 나서 주지 않은 채 모든 의심과 일방적인 공격이 에리스텔라를 향할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 사람도 없으니까.

결국,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변할 거라는 걸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을 가장 옆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한때는 그 역시 함께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오해들이 안타까웠다.

하인리시온은 그날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아주르디 백작가 문제로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아볼 때, 여러 가지 사실을 함께 알게 되었다.

에리스텔라가 실종된 날, 흑마법사와 전투를 벌였다는 것도.

다만, 어쩌다 에리스텔라가 그들에게 당하게 되었는지까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문제는, 에리스텔라의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중요했다.

“너 혼자서 흑마법사들을 쫓았던 걸 알려야 해. 사람들을 지키려고 그런 거잖아.”

[거창한 이유 따위 없었어. 그냥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을 뿐이야.]

에리스텔라는 너무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국의 수호자라는 명성은 그저 장식이 아니었기에.

그녀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 해결하려고 한 것이라고.

그러니 해명해야 할 말도 없다고. 에리스텔라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네가 실종되던 날.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어?”

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하인리시온은 답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우가 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에리스텔라가 그런 하인리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흑마법사와 싸웠고 어쩌다 보니 여우가 됐어. 그게 전부야.]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더 설명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 듯 짧고 무미건조했다.

“내가 묻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왜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 거야?”

성의 없는 그녀의 대답에 결국 하인리시온은 답답함을 표출했고.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에리스텔라의 눈빛 역시 사나워졌다.

혹시 내가 정말로 흑마법사들과 뭐라도 있는 거 같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사실 그들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나일 테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건가.

에리스텔라가 까칠한 불만을 쏟아 냈다.

[지금 나한테 내가 왜 졌는지 물어보는 거야?]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하인리시온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에리스텔라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의 단호한 눈빛에 에리스텔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그냥 방심해서 졌어.]

물론 방심은 금물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핑계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에리스텔라의 해명은 누가 들어도 구멍이 숭숭 난 핑계였다.

이 이상 추궁해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인리시온은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녀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에리스텔라. 사실을 밝히는 데에도 시기가 중요해.”

지금 입을 열지 않으면 해명할 수 있는 시기를 영영 놓치게 될 것이다.

“이대로라면 네가 흑마법과 결탁했다는 누명을 쓰게 될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러다가는 나중에 네가 돌아올 자리가 없어질 테니까.”

이대로라면 황녀 에리스텔라는 제국의 오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황녀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돌아갈 자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득이었다.

그때였다.

[꼭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에리스텔라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작은 목소리였지만 하인리시온의 귀에는 확실하게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흑마법사들을 정리하고 나면 이곳에 없어도 괜찮을 거 같아.]

여우가 되어 보니 그동안 살아온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오해를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밝혀야 하는 진실이 있었다.

‘그건 밝히고 싶지 않아.’

그녀가 흑마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훨씬 오래전의 일이었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인생 중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날. 비통함에 목 놓아 울다가 지쳐서 쓰러졌었다.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더는 이런 식으로 절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에리스텔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아직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진실까지도.

이 진실만큼은 아직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의 기억에 비한다면 지금의 오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의 오해와 경멸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미움받는 건 익숙한 일이니까. 언제나 그래 왔던 일이니까.

하지만 조금은 지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결국, 에리스텔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림자마저도 존재를 드러내지 못할 만큼 유독 어두운 밤.

하인리시온과 여우는 침대 위에서 마치 선이라도 그은 것처럼 냉랭하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여우가 뒤를 힐긋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끝내 에리스텔라는 모든 사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이대로라면 네가 흑마법과 결탁했다는 누명을 쓰게 될 거야.’

하인리시온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를 믿는 만큼 그의 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하인리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믿어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에리스텔라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를 믿어 주는 사람한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내 태도 때문에 기껏 믿어 주었던 마음에 상처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하인리시온이 다시 예전처럼 싸늘한 태도로 나를 대하면…… 아마 지금까지보다 더 상처받지 않을까.

에리스텔라가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의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앞발로 살짝 잡고서 눈을 꼭 감았다.

***

‘누구 맘대로.’

하인리시온으로서는 에리스텔라의 그런 태도가 가장 화가 났다.

문제가 생겼다.

그게 정말 잘못한 일이든 억울한 일이든 자신이 연루되었다면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언제나 모든 소문을 인정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면서.’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

그걸 말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하지만 그녀는 그를 믿지 못했다. 그러니 입을 다무는 거였다.

‘내가 믿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예전이라면 하인리시온도 더 이상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에리스텔라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오해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지만, 하인리시온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여기서 더 알아보지 않으면 에리스텔라에 대해서 알게 될 수 없다는 걸.

그러니 에리스텔라가 입을 다물어도 하인리시온은 집요하게 파 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는 자들의 입을 모두 다물게 만들 것이다.

“로웬. 프루투 영지로 직접 가 보도록 해. 가서 네가 확인해 봐.”

그날의 모든 일이 벌어졌던 곳에서부터 샅샅이 뒤지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황녀가 실종되던 날에 대해서 놓친 게 없는지. 사소한 거까지 전부.”

하인리시온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하인리시온의 오기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유치한 마음으로 에리스텔라를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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