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내가 사라지고 난 후에 라테른 후작 영애가 잘못을 꽤나 저질렀어.
특히, 내가 없다는 이점을 이용해서.
내가 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을 마음껏 저지르고 있지.
그러니 이건 내 잘못도 있어.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공백에 대해서는 조금도 준비하지 못했었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 상황. 6개월 만에 달라진 것들.
분명 그 시간 동안에 생겨난 부작용들에 대한 책임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게다가…….
‘내 사람도 지키지 못할 정도면 황녀 실격이지.’
그러니까 나만 믿고 기다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소니아의 잃어버린 권리들을 되찾아 줄 테니까.
[샬롯.]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테른 후작 영애 쪽 동향을 지켜보라는 거지?”
[응. 내가 없으니까 조심도 하지 않고 행동할 거야.]
에리스텔라는 실종되기 전에 그레타 후작 영애에게 이미 경고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녀가 남긴 말을 증명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에리스텔라는 소니아와 샬롯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
한편, 황궁 회의를 하고 돌아온 하인리시온은 지난 며칠 동안 마법사들이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그를 위해 로웬과 논의 중인데 어느새 다가온 에리스텔라가 끼어들었다.
“너 자꾸 여기저기 끼어들래? 네가 아무리 여우라고 해도…….”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냉정하게 쫓아내려고 했다.
[내 일이잖아.]
그래 봐야 에리스텔라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자기 뜻을 주장했지만.
[무슨 얘기 했어?]
로웬이 있어 에리스텔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하인리시온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이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내 욕했구나?]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괜찮아.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그래서 정확히 내 욕을 어떻게 했는데?
에리스텔라의 집요한 시선에 결국 하인리시온은 로웬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흐음. 그거참. 걔네들이 할 법한 말이기는 한데. 또 신경이 쓰이기는 하네.]
혹시 흑마법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하고.
에리스텔라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할 거야.]
그럼 이번에 벌어진 사건은 우스워질 정도로 더 많은 일이 벌어질 거다.
에리스텔라가 말을 하다 말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신거울의 한쪽 구석을 간신히 차지한 조그마한 여우 한 마리.
행동반경에도 제약이 걸리는 힘없는 존재.
에리스텔라가 맞지만 에리스텔라 황녀라고는 할 수 없는 존재.
한동안 여우로 지내는 게 즐겁기도 했었다. 그래서 조금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안 된다.
‘지금은 에리스텔라 황녀가 필요해.’
이미 흑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에리스텔라는 힘이 되기는커녕 짐만 될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서둘러 찾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조사한 곳들 중에서는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는 못했는데.
흑마법사들이 제대로 날뛰기 전에 어떻게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찾아낸 실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은 좀 더 알아봐야 부분이 있어서 말할 수 없었다.
[뭐? 왜 그래?]
따끔거리는 하인리시온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에리스텔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인리시온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하인리시온이 자신을 이렇게 쳐다본 적은 처음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도망가고 싶게.
괜히 긴장되잖아. 에리스텔라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거야?”
사실 그동안 궁금했었다.
[어떻게 하기는.]
에리스텔라는 바로 대답하려고 했으나 이내 말문이 막혔다.
[음…….]
왜 아무 생각도 안 나지?
원래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 생각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질문을 받고 나니 딱히 꼭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심히 고민하던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쩍 뜨이며 앞발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일단 너랑 파혼부터 할까.]
“……그게 가장 먼저 할 일이야?”
[열심히 도와줬는데 일단 그거로라도 보답해야지.]
에리스텔라가 은혜를 갚는 여우의 자태를 뽐내자 하인리시온이 황당해하며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로웬이 들어오자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언제 대화하고 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로웬은 그런 둘의 어색한 행동을 눈여겨볼 정신도 없이 들어왔다.
“전하. 급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프루투 영지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새로운 증거라니?”
‘증거?’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동시에 반응했다.
“프루투 영지에서 흑마법에 관한 조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흑마법사 무리가 황녀 전하께 쓴 쪽지라고 합니다.”
“쪽지?”
‘이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예. 마법으로 보호 처리가 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왠지 무슨 내용일지 알 것 같았다.
“조작이라도 한 건가.”
“정확한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합니다.”
“뭐?”
하인리시온의 고개가 저절로 에리스텔라를 향해 돌아갔다.
“그런 게 있었어?”
‘아니.’
에리스텔라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놈들이랑 내가 간질간질하게 쪽지라니.
하인리시온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난번 회의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그저 치기 어린 열등감에서 나온 의심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일을 저지른 건가.
“그래서 지금 상황은?”
“아직 단언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쪽지가 나왔다는 말이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일부러 소문내듯이?”
“……아마도 그런 듯싶습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가 흑마법과 연루되어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황녀의 실종 당시에 있었던 의혹과 함께 사실 황녀의 실종이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자작극이라는 상상력까지 덧붙여지면서.
오래전부터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던 황녀가 실종으로 위장한 후 그들에게로 완전히 가 버린 것이라고.
거기에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조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말에 힘을 보태는 증언들까지 하나씩 나왔다.
에리스텔라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흑마법사가 직접 나서서 소동을 일으켰을 때부터, 귀족들 간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하인리시온일 줄 알았다.
그의 상징성은 제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니까. 그래서 하인리시온의 주변을 살피고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내려 했다.
‘그런데 나였구나.’
대외적으로 죽은 사람.
그렇기에 변명할 수 없으니, 에리스텔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나온다라.’
에리스텔라의 가늘어진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을 파악한 에리스텔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놈이 이런 판을 짰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럴싸하기까지 하네.’
하긴 에리스텔라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떤 정황도 증거도 없었다.
언제나 독단적으로 행동했기에 반대로 그게 오해의 소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이용했네.
‘제기랄. 되게 꼴 보기 싫은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아.’
하필이면 재수 없는 그놈이 한 말을 떠올린 에리스텔라가 살짝 인상을 쓰며 그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
“전하께서는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런다고 전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듯합니까.”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사람 성질을 긁는 그 생글거리는 미소를 보자 약이 잔뜩 오른 에리스텔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에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전하를 배신할 겁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어쨌든 그놈의 말이 맞았다는 게 짜증이 났다.
“황녀 전하와 정의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요.”
“누가 정의야. 나는 그냥 내 맘에 안 드는 놈들을 처리하는 거야.”
“솔직히 답답하시지 않습니까. 마음 가시는 대로 살아 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랍니다.”
그러면서 그놈이 손을 뻗어왔다.
물론, 에리스텔라는 그 손을 발로 차 버렸지만.
그러고도 반대쪽 손을 내미는 놈의 뻔뻔한 미소가 굉장히 재수 없었다.
“전하. 기억하십시오. 제 말이 증명되는 날에는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셔도 됩니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