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살아 있을 수도 있죠.”
데클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그럼 정말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대책을 세워야…….”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황녀가 만에 하나라도 다시 나타나는 순간.”
그의 눈빛에 광기가 떠올랐다. 그 시선을 받은 이들은 감당하기 힘든 기세와 함께.
“제가 나설 겁니다.”
“아…….”
“여전히 불안하십니까?”
데클렌이 살짝 입꼬리를 올린 순간 그의 주변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그 기세에 짓눌린 그들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저희에게는 데클렌 님이 있는데요.”
“그럼 걱정은 접어 두고, 각자 해야 할 일을 수행하시지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를 띤 채로.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에는…… 황녀를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될 테니까요.”
“……네.”
데클렌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임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들의 목숨을 단번에 거둬 버릴 힘이 있었다.
데클렌의 주위에 있던 이들이 도망치듯이 물러났다.
모두가 사라진 후 데클렌 혼자만이 저택에 남아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고요한 저택.
그가 사뿐하게 걸음을 옮겨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을 타고 들어온 달빛을 맞이하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못 뵌 지 6개월이나 되었네.”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린다면 이질적이기까지 한 맑은 미소를 띤 채로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황녀께서는 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으시려나.”
***
갑자기 목덜미에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에 에리스텔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갑자기 기분이 더럽지?
갑자기 그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무척이나 욕을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가 아주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야.’
에리스텔라가 잔뜩 구겨졌던 얼굴을 몇 번 탈탈 털어내며 쌩쌩하게 돌아왔다.
‘무시하자. 무시하고 집중해야지.’
에리스텔라는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얼마 전, 하인리시온에게 다량의 마력석을 받은 후부터 마력량을 높이기 위해 주기적으로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에는 넘쳐나기만 하던 마력이기에 조금씩 마력의 양을 키워나가는 것은 생소한 감각이었다.
‘게다가 힘들고…….’
에리스텔라가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에휴. 벌써 지쳤다. 체력이 너무 빨리 떨어지는데.
그럼 방법은 하나지.
에리스텔라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소니아가 다가왔다.
“여우님. 식사 시간이에요.”
‘고기!’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적 뜨였다. 오늘 하루 중 가장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두 배 더 준비했어요.”
‘역시 소니아야.’
에리스텔라가 기뻐하면서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먼저 자리를 잡은 하인리시온과 함께 식탁 위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에리스텔라의 눈길을 끈 건 여우를 위해 먹기 좋게 잘린 채로 수북이 쌓여 있는 고기였다.
‘이거지!’
에리스텔라는 더욱 가열차게 식사에 열중했다.
이걸로라도 체력을 보충해야지.
그 모습을 옆에서 하인리시온이 질린다는 듯이 바라보건 말건.
오로지 고기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집중하던 에리스텔라가 옆에서 느껴지는 빤한 시선에 눈동자만 움직여 쳐다봤다.
‘안 먹어?’
처음과 별로 차이가 보이지 않는 하인리시온의 접시가 눈에 띄었다.
‘그럼 내가 먹어 줄까?’
에리스텔라가 고기를 한 점 더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의 포크가 가로막았다.
“네 거 먹어.”
‘에이. 치사하게. 혹시 먹다가 남을 거 같으면 말해.’
에리스텔라는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게다가 소니아가 밤낮 할 것 없이 간식을 끊임없이 챙겨 주었다.
그것도 에리스텔라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그렇게 체력을 보충하고 마력을 흡수하며 훈련에 몰두하기를 며칠째.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확실히 타고난 마법사 체질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여우가 되어도 체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마력을 계속 접하다 보니 흡수 가능한 양도, 한 번 사용 가능한 양도 점점 늘어났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에리스텔라의 자신감도 쭉쭉 높아졌다.
‘좀만 더 열심히 하면 상위마법 하나둘쯤은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에리스텔라의 일과는 단순해졌다.
하루 종일 마력을 흡수시키고 간식으로 몸을 회복시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샬롯과 소니아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러다 늦은 밤이 되면, 침대에 등을 대자마자 순식간에 까무룩-잠이 들었다.
***
에리스텔라가 오전 내내 마력을 끌어모으다가 지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샬롯이 싱글벙글 웃으며 초대장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짜잔. 이것 좀 봐.”
[그게 뭔데?]
샬롯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초대장을 펼쳐 보였다.
- 오페라 극장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귀빈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부디 참석해 주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여기에 라테른 후작 영애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영애들이 참석할 거야.”
[오-!]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나도 데리고 가.]
지난번 황궁에서의 연회로는 귀족들을 파악하기 부족했다. 중간에 아주르디 백작가의 문제도 있었고.
에리스텔라도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다.
“좋아.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데리러 올게. 그럼 그때 보자.”
샬롯이 돌아가고 난 후에 에리스텔라는 기대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도 그냥 갈 수는 없지. 세리안을 찾아가 볼까.’
샬롯이 준 초대장을 야무지게 입에 문 에리스텔라가 돌아섰을 때였다.
두둥.
어디서 이상한 효과음이 나는 것 같더니 하인리시온이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흐음.”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하인리시온의 뚱한 얼굴과 에리스텔라의 탐색하는 얼굴이 맞닿았다.
서로를 빠아안히-
“너.”
‘뭔가 못마땅한 얼굴인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표정을 파악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요즘 바쁜 거 같던데.”
‘그랬나. 요즘 좀 바쁘기는 했지.’
“식사 시간이랑 잠잘 때 빼고는 보이지도 않고. 지금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게다가 외출도 하는 듯하고.”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가 문제가 있나?
하인리시온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썼다.
“두 사람이 있으니 나는 이제 필요 없나 봐?”
‘?’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음……. 흐음…….
에리스텔라가 복슬복슬한 머리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소니아랑 샬롯이랑만 어울려서 삐졌어?
‘에이, 아니지?’
설마 하인리시온이 그런 거로 삐질 리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왜 자꾸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지. 눈꼬리가 왜 이렇게 휘어지는 거지.
‘참 이유를 모르겠네.’
에리스텔라가 웃음을 참느라 작은 몸을 떠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사실, 하인리시온 자신도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냥 기분이 나쁘고 속이 배배 꼬이기는 하는데, 정작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에리스텔라가 자신만 빼놓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심술이 났다.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나는 뒷전인 건가.
서운한 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
에리스텔라가 입꼬리를 씰룩이면서 하인리시온을 불렀다.
[하인리시온.]
“…….”
[시온.]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던 하인리시온이 집요한 부름에 에리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 얼굴 가까이 다가간 채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하인리시온. 그동안 네가 섭섭해하는 거 같아서 내가 특별히 자리를 마련했어.]
“내가 언제?”
대답하자마자 하인리시온은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빠르게 반응했다. 오히려 인정하는 꼴이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역시나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 눈웃음이 묘하게 얄미운 건 하인리시온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뭐 하자는 거야.”
이미 완전히 에리스텔라에게 휩쓸린 하인리시온은 반쯤 자포자기했다.
어쩐지 에리스텔라의 뜻대로 될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샬롯이 오페라 연회 초대장을 가지고 왔어. 내가 부탁한 대로 나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기 좋을 거 같아.]
“샬롯이 활약하기 좋을 거 같기는 하네.”
나도 거기 가서 상황을 보고 싶어. 샬롯한테 부탁해 놓기는 했지만…….
[같이 가자!]
“내가 거길 왜…….”
여우의 주인은 시온, 너니까. 당연히 네가 참석해야지.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설득했다. 사실상, 갈 수밖에 없도록 압박한 것이지만.
[너만 따돌리는 거 같아서 서운하다며.]
하인리시온이 황당해하며 거부 의사를 드러내자 에리스텔라가 머리를 빤히 들이밀며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순간 하인리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하인리시온이 질색하며 반박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좀 도와줘. 시온.]
“…….”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하인리시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먼 허공을 한 번 바라봤다.
그래 봐야 여우가 갑자기 머리 위까지 올라와서 그의 시야를 가려 버리는 바람에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
결국,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뜻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리시온이 오페라 연회에 참석한다는 연락을 받은 주최 측에서, 환호하며 이 사실을 각 참석자에게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