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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9)화 (39/123)
  • 39.

    그 당시, 샬롯이 아닌 딜라일라였던 시절.

    그녀는 이미 현실을 알고 각오도 충분히 되어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철없는 착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무슨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는지.

    어쩔 수 없이 딜라일라는 황실의 일원이었고 그들에게는 중벌이 아닌 이상 면책권이 있었다.

    게다가 크게는 황실의 일원이지만 본질은 가문 개인의 문제이기에 황제나 황녀인 에리스텔라가 강제로 중재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샬롯의 유산에 대해 알리며 협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왜 그때 나한테 아무 설명도 안 해 줬던 거야?”

    전후 사정을 말해 준다면 샬롯은 에리스텔라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건 오롯이 홀로 서는 거였잖아.]

    “…….”

    [근데 내가 도와준다는 걸 알면 힘들 때마다 내가 떠오르겠지. 그럼 네가 황실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얽매이게 될 테니까.]

    그러니 에리스텔라의 역할은 샬롯이 오롯이 혼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까지였다.

    그리고 샬롯은 모르게 뒤에서 최악의 상황에 닥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 정도였다.

    ‘사실, 어차피 어떤 방식으로든 샬롯도 나를 싫어하는 날이 올 테니 이번에 오해를 사도 상관없다고 여겼던 것도 있었긴 하지만.’

    그건 말하는 순간 샬롯이 성질을 부릴 것 같으니 절대로 비밀로 해야 했다.

    에리스텔라의 말을 듣던 샬롯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자신의 친구에게 말했다.

    “너의 예상대로네. 보다시피 나는 너한테 독기를 품으면서 보란 듯이 이렇게 잘나가잖아?”

    샬롯이 특유의 오만하면서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도와준 거야.”

    은혜를 입었다.

    그것도 모르고 에리스텔라가 자신을 배신한 줄 알고 원망했었다.

    “처음에는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모른 척했는데.”

    샬롯이 머쓱해 하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자연스레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샬롯이 한껏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나 몇 달 전에 마리오네트 공연했어. 내가 가장 하고 싶어 했던 그거.”

    에리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공연이었으니까.

    “완전 끝내줬어.”

    무대 위 자신의 멋진 모습을 떠올리며 샬롯은 여운을 만끽했다.

    “그때 초대하려고 했는데…….”

    샬롯은 뒷말을 삼켰다. 화해를 청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친구는 사라져 버렸다.

    “너무 늦어 버린 건가 싶었거든.”

    샬롯의 시선이 여우를 향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안도감이 감돌았다.

    “다음에 공연 보러 와. 초대장 줄 테니까.”

    그녀가 가볍게 살풋 미소를 띠며 제안했다.

    “그때는 더 끝내줄 거야.”

    자신감이 가득한 매력적인 미소만으로도 기대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에리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샬롯의 초대에 응했다.

    꼭 갈게.

    가서 얼마나 잘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줘야지.

    몇 년 동안 끊겨 있던 두 사람의 약속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샬롯의 눈빛이 변했다.

    “이제부터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든 말만 하라고. 자신이 해내겠다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분명 샬롯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에리스텔라의 눈빛 역시 변했다.

    ‘그 의욕 거절하지 않을 거니 잘 부탁해.’

    아주 넙죽 받아 들 거다.

    으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사교계에서 동향을 주의 깊게 관찰해 줘.]

    “요즘 사교계에 온갖 연회와 티파티에 초대받으니까. 거기서 살펴보면 되겠네.”

    [특히 각종 험담이나 이간질하는 내용들 위주로.]

    에리스텔라가 콕 집어 요구하자 샬롯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이내 그녀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응.]

    “어렵지 않지.”

    샬롯이 눈을 찡긋하며 자신 있어 했다. 에리스텔라도 걱정하지 않았다.

    사교계를 잔뜩 휘젓는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부추기는 게 샬롯의 장기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교계에서 내 빈자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봐 줘.]

    이번 아주르디 백작 부부 사건을 겪고 난 후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흑마법에 연루된 자들이 에리스텔라의 빈자리를 이용하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을 테니, 이쪽에서 직접 알아낼 수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샬롯에게 필요한 충고와 부탁을 다 하고 나니, 소니아가 에리스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뭘 할까요?”

    하지만 내심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소니아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혹시 황궁 상황을 좀 알아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황궁 상황이 신경 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끔씩 황제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가.

    겉으로 드러난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내밀한 변화를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부 관계자들만이 아는 정보가 필요했다.

    다만, 샬롯은 황실을 박차고 나왔으니 황궁에 접근할 수 없었고, 하인리시온은 오히려 존재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소니아에게 맡겨야 했다.

    하지만 황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 부담이 될 듯싶어 조심스러웠다.

    “걱정 마세요. 황궁에 아직 인연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러니 제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소니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황실에 관련해서는 시녀와 시종들에게서 나오는 정보가 가장 정확했다. 그 의미를 알기에 소니아는 책임감을 느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되자 샬롯이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그럼 이제 진짜 정보를 줘야지.”

    […….]

    “언제부터 흑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야?”

    샬롯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동안 에리스텔라는 이 화제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설명해야 할 때였다.

    [흑마법의 존재를 눈치챈 건 좀 됐어. 그동안 몇 번이나 흑마법의 세력을 마주친 적도 있었고.]

    “그걸 왜 알리지 않았던 거지?”

    하인리시온이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지금 같은 혼란이 올 테니까. 그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 말을 증명하듯 지금 사교계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자취가 사라져 아는 게 없으니까.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정보를 모으고 흑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알아 갈수록 더욱 알릴 수 없었다.

    [흑마법은 우연히 퍼진 게 아니었어.]

    개인의 욕심이 잠시 불러일으킨 어설픈 사건이었더라면, 에리스텔라 혼자서 충분히 그들을 제압하고 정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생각보다 거대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두려워졌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틀림없이 구심점이 있어.]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이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최종적인 목표조차 모르는 지금은.

    게다가 그들의 구심점이자 에리스텔라를 여우로 만든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었다.

    ***

    제국 수도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지독하리만큼 평범한 저택.

    귀족들은 물론이고 부유한 상인이나 명망 있는 장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네인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갔다.

    누가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그곳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곳곳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저택 내에는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 군데군데 보였다.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른 뒤틀린 기운. 그 정체는 흑마법이었다.

    “디케이든 후작도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데려간 것 같은데, 정확한 증거는 잡지 못했습니다.”

    “디케이든 후작이라. 어차피 쓸모가 다한 사람이기는 했죠.”

    “문제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나선 것 같다는 겁니다. 벌써부터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세 사람의 대화를 듣던 데클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요.”

    그들의 구심점인 데클렌이 말했다.

    여전히 여유롭고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한껏 긴장한 채 대화를 나누던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데, 몸을 사리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럼……?”

    “방향을 바꾸도록 하죠.”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데클렌이 말할 때마다 모두가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데클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어…… 황녀는 정말 죽은 게 맞습니까?”

    “그럼요?”

    “제가 데클렌 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묻어 두기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을 꺼냈다.

    “이번 아주르디 백작가 일도 그렇고, 저희가 계속 찾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황녀의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아무래도 찝찝합니다.”

    “만약 황녀가 살아 있으면…….”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막강한 흑마법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존재.

    그게 에리스텔라 르노 리오나르프 황녀였다.

    그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데클렌이 의미심장하게 느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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