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8)화 (38/123)
  • 38.

    샬롯의 입술이 의미심장하게 서서히 벌어졌다.

    “에리스텔라.”

    “……!”

    ‘어……?’

    소니아와 여우가 놀라 굳는 모습을 본 샬롯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내가 설마 못 알아볼까.”

    샬롯은 떠보는 게 아니라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언제부터……?’

    에리스텔라가 방어적으로 소니아의 뒤로 슬금슬금 몸을 숨겼다.

    하지만 샬롯의 시선이 집요하게 여우를 따라붙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소니아가 여기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뭐가 있구나 싶기는 했지.”

    소니아가 흠칫하며 놀랐다. 샬롯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아는 소니아가 아무 이유 없이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일할 리가 없거든. 그동안에도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걸 거절해 왔는데.”

    “저한테 해 주신 제안은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거절한 건…….”

    역시나. 샬롯이 서운해하는 걸 눈치챈 소니아가 해명하려 할 때였다.

    “나는 진심이었어. 내가 누구랑 달라서 말이야. 아끼는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거든.”

    “…….”

    “그런데 매몰차게 나를 거절하더니 아델라시아 가에서 지낸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좀 서운하기는 했어.”

    샬롯의 말은 사실상 에리스텔라를 겨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눈을 부릅뜨며 샬롯을 노려보았을 때였다.

    “……딸꾹!”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마주친 샬롯이 에리스텔라를 향해 싱긋 눈웃음을 쳤다.

    “저렇게 금방 욱하는 걸 보니 완전 에리스텔라네?”

    ……당했다. 제대로 휘말려서 아닌 척 발뺌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나타난 여우라니.”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변신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가족과 하인리시온 외에 더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울렸던 샬롯을 기억해 낸 에리스텔라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갑자기 대공가에 나타난 여우, 아델라시아 가문에서 일하게 된 소니아.

    약간의 단서만 보고도 눈치 빠른 샬롯은 진실에 다가섰다.

    “열심히 정체를 숨기는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나한테 들켜 버렸네?”

    샬롯이 한쪽 입꼬리를 의미심장하게 올렸다.

    흥미진진해 보이는 샬롯과는 달리 에리스텔라는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아직 샬롯에게 정체를 밝힐지 말지 결정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 보고 결정하려고 한 건데. 이런 식으로 바로 들킬 줄이야.

    과연 오늘 샬롯을 부른 게 잘한 일일까. 샬롯의 날카로운 눈을 마주하자 에리스텔라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에리스텔라와 샬롯 사이에는 악연이라 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

    황가의 방계이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리 좋지 못했다.

    술독에 빠져 사는 방탕한 아버지. 얼굴도 보기 힘든 어머니.

    그 아래에서 자라는 아름답고 영리한 소녀.

    딜라일라.

    어린 소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노래였고, 공연에서 본 장면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에리스텔라는 딜라일라가 따라 하는 공연을 몇 번이고 관람하는 관객이었다.

    한때는 그 옆에 하인리시온도 함께였던 적이 있었다.

    어린 딜라일라는 꿈을 꿨다. 앞으로도 이렇게 노래와 연기를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동시에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자라면 재산뿐인 상대와 결혼시킬 작정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낭비벽과 돈만 버릴 뿐인 터무니없는 사업 탓에 황실의 지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니 가문이 샬롯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그렇게 자란 소녀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여덟이 되는 순간.

    그녀는 황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고 바로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선언은 엄청난 논란이 되었고,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고는 있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샬롯은 그 당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눈에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도와줄게.”

    ‘어…….’

    에리스텔라가 눈을 끔벅였다.

    “이걸로 내가 진 빚은 갚는 거로 치자.”

    ‘빚?’

    그런 게 있었나.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황가의 신분을 벗어날 때, 네 덕분이었다는 거 알아.”

    마치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샬롯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몰랐어. 그래서 너를 원망하고 화를 냈었는데.”

    그 당시, 딜라일라였던 샬롯은 혼자만의 의지로 가문을 나오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가족들이 절대 놓아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곳은 황제와 황녀인 에리스텔라뿐이었다.

    그들의 지지가 그녀에게는 간절했다. 그래서 샬롯은 에리스텔라에게 부탁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그때, 분명 에리스텔라는 샬롯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얼마나 원해? 모든 걸 걸고서라도. 다른 모든 걸 버리더라도 원해?”

    그때,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황제가 중재에 나서며 샬롯의 뜻을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샬롯의 가족들은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샬롯은 최후의 방법으로 수도를 벗어나 떠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제안을 해 왔다.

    “너의 외증조모께서 너에게만 남겨 놓은 유산이 있다는 걸 왜 부모에게는 숨긴 거니?”

    혹시나 하는 기대는 그 한 마디로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무너졌다.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마저 일었다.

    “네가 정 나가고 싶으면, 그건 내놓도록 해라. 그러면 인정해 주마.”

    외증조모가 가지고 있던 영지와 무역선으로 인해 그녀에게 돌아오는 지분은 웬만한 가문들에 필적하는 규모였다.

    그들은 그걸 받아낸 후에 샬롯을 놓아줄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쿵쿵-쿵쿵쿵쿵—

    심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그건 어릴 적 그녀를 유난히 아끼던 외증조모가 가문의 앞날을 예견하며 샬롯에게 몰래 남긴 것이었다.

    그걸 아버지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 아니, 딱 한 사람에게 말한 적 있었다.

    에리스텔라.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유산이 나한테는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네가 분명히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다고 했잖아.”

    샬롯은 곧바로 에리스텔라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항의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친구로서 해야 할 변명 따위도 없이 냉정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들도 너한테 얻은 게 있어야 놓아주지 않겠어?”

    아, 그래. 분명 내가 모든 걸 걸고서라도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한마디도 없이 이런 짓을 벌여도 된다는 건 아니었어.

    “선택해. 네가 포기하면 그 유산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이미 최악으로 내몰린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뿐이었다.

    결국 샬롯은 가족 중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외증조모의 유산을 가문에 넘기고 빈털터리로 나왔다.

    혼자서 당장 집도 구할 수 없는 꼴로. 고작 며칠 식사를 때우고 잠잘 방 한 칸을 구하는 게 전부인 돈만 가지고서. 그녀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그때는 그 모든 게 에리스텔라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샬롯은 그날의 시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연륜이 생겼다.

    그 당시에 아직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샬롯은 황실의 일원이라는 배경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생각보다 쉽게 여겼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시궁창 같다고 해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많은 걸 가진 게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녀의 계획은 희망찬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가 한 일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아냈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딜라일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샬롯이 되는 날, 에리스텔라를 향해 할 수 있는 모든 악담과 원망을 퍼부었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겠노라고 독기를 품었다.

    샬롯은 그렇게 빈털터리로 평생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면서 하룻밤 지샐 방을 구하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모든 순간이 지독하리만큼 힘겨웠고 어떤 날에는 황실에서 벗어난 것을 후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에리스텔라를 향한 원망은 그녀가 무슨 일이든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돈을 모으고 오디션에 합격해 무대에 올라 기반을 다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이 이미 유명세가 퍼질 대로 퍼진 빈털터리한테 친절할 거라고 생각했어?”

    “……친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구경을 못 했는데 무슨 말이에요?”

    “세상에 더러운 일이 고작 그뿐인 줄 알아? 곱게 자라서 그런가. 여전히 세상 물정을 영 모르는구만.”

    “……?”

    샬롯이 혼자서 일을 얻을 수 있고 돈을 떼먹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허름하고 문고리조차 고장 난 방에서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에리스텔라가 남몰래 지원해 주었던 덕분이었다.

    “뭐, 그래도 대단하긴 해. 최악만 면했다는 거지 온갖 시답잖은 조롱과 시선에도 여기까지 해낸 걸 보면 말야.”

    “…….”

    그제야 샬롯은 지난 순간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에리스텔라의 배려를 알게 되었다.

    “그때는 네 방식이 나한테는 너무 가혹하고 배신감도 들었지만, 지금은 알겠어. 그런 방식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가족들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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