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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7)화 (37/123)
  • 37.

    ***

    고작 이틀이 지나자마자 샬롯이 대공가를 방문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햇빛 아래 유난히 빛나는 은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길고 찰랑거리던 머리가 지금은 턱에 닿을 듯 말 듯한 단발이 되어 있었다.

    “대공저에는 무척 오랜만이네요.”

    “그렇군.”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샬롯으로서는 처음으로 인사드리네요.”

    샬롯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던 강렬한 붉은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그녀의 단발머리나 가벼운 옷차림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까지.

    어느 곳 하나 사교계 예절에 걸맞은 부분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제국 사교계의 이단아.

    한때는 레이디였으나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서 이름을 바꾸고 오페라 가수가 된 여자.

    그리고 황가의 방계. 본래 이름은 딜라일라 리오나르프.

    당연히 하인리시온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녀가 오페라 가수가 된 이후로는 만난 적이 전무했지만.

    “……소니아가 부탁하기에 그러라 했을 뿐이야. 편하게 이야기 나누도록 해.”

    하인리시온이 자리를 비켜 주려고 할 때였다.

    “제 방문을 흔쾌히 허락해 주신 것도 그렇고, 이렇게 직접 마중 나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수많은 소문을 이끌고 다녔다. 그녀와 잠깐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녀가 어딘가를 방문해서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수많은 상상력이 더해졌다.

    그렇기에 체면을 따지는 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 극도로 조심하며 자리를 피하고는 했었다.

    그에 반해 하인리시온의 행동은 에리스텔라가 보기에도 의외였다.

    “나는 오랜만에 지인을 초대한 것뿐인데 다른 걸 고려할 필요가 있나.”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샬롯을 어릴 때와 똑같이 대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거 참 고마운 말이네요. 그럼 오랜만에 예전처럼 어울려요. 담소를 나눠 본 지도 오래잖아요?”

    “그럼 그럴까.”

    결국, 하인리시온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한 마리 여우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가벼운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 하인리시온의 귀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에리스텔라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게 혹시 예전에 그 첫사랑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샬롯을 쳐다봤다. 샬롯의 입이 폭주하고 있었다.

    크아앙!

    에리스텔라가 팔이라도 콱 깨물어 대화를 중단시켜 보려 하지만 하인리시온에 의해 붙잡혀 저지당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도 하거든.”

    ‘생각하지 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에리스텔라가 절대로 이어질 수 없다고 했었잖아.”

    야. 야. 너!

    미치고 팔짝 뛰겠다.

    에리스텔라가 어떻게든 샬롯의 입을 막아 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고작 여우가 미친 경주마처럼 달리는 샬롯의 입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몰래 사랑의 도피를 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에리스텔라한테 첫사랑?”

    기어이 하인리시온이 몸을 반쯤 돌리며 반문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에리스텔라에게 첫사랑이라니. 게다가 대충 들어도 뭔가 사연이 느껴졌다.

    에리스텔라를 힐긋 쳐다봤지만, 네 발을 바둥거리며 정작 시선은 피해 버렸다.

    반응이 수상한걸.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샬롯과 소니아를 향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재촉이었다.

    “있었지. 확실히 있었어.”

    샬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하인리시온의 더욱 가늘어진 눈매가 소니아를 향했다.

    “네. 분명 있었습니다. 그것도 꽤나 좋아하셨던 거 같은데.”

    하인리시온의 압박에 소니아 역시 대답했다.

    나…… 왜 식은땀이 나지?

    “그게 누구지?”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누군지 절대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소니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행히 그날 밤, 술에 취해서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쏟아붓던 에리스텔라가 그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 완전히 쓰러져 버렸으니까.

    ‘그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하인리시온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모른 척 딴청을 부리고 있는 여우에게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했다.

    갑자기 이 화제가 왜 나온 거야.

    당혹스러운 에리스텔라와는 달리 대화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다고 하셨었어요.”

    “게다가 차였다고?”

    제발 그만 좀 말해. 다른 이야깃거리도 많은데 왜 계속 이 주제로만 말하는 거야.

    너무 창피해서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제발 그만해! 입 좀 닥쳐!

    하인리시온의 고개가 스윽 여우를 향해 돌아갔다. 저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대체 어떤 놈을 만나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누군지 나중에 말해.

    “그래서 누구야?”

    ‘……으.’

    “그 대단한 첫사랑은?”

    하인리시온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때마다 시선을 피했지만 도통 포기하지 않았다.

    미쳐 버리겠네. 진짜!

    내가 어떻게 말해. 절대 말 못 해! 죽었다 깨어나도 말 못 해! 안 해!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은 보란 듯이 샬롯과 소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쪽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간 것은 물론이었다.

    하인리시온의 짓궂은 장난은 집요했다.

    “궁금하네. 그런 사람이 있는 줄 알았으면 도와줬을 텐데.”

    ‘네 도움 필요 없어.’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제가 대신 몇 번 조언해 준 적이 있기는 하죠.”

    “흐음. 그래서?”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샬롯과 하인리시온은 신이라도 난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제 말대로 해 보긴 한 거 같은데…… 별로 잘 안 됐나 보더라고요. 저한테 굉장히 까칠했던 거 보면.”

    그건 네가 처음부터 이상한 조언을 해 준 거였잖아!

    샬롯 덕분에 자신이 쌓아 놓은 흑역사가 떠오른 에리스텔라가 울부짖었다.

    아우우우우-!

    그러거나 말거나 샬롯의 입은 계속 움직였지만 말이다.

    “예상되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한데…….”

    샬롯이 비밀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누구지?”

    “그야 쉽게 말해 줄 수 없죠.”

    샬롯은 말할 듯하다가도 입을 다물었지만 조금만 더 캐물으면 죄다 말해 버릴 것 같아 어쩐지 불안했다.

    대체 누굴 생각하는 거야?

    절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든 맞을 리 없으니까.

    그 입 제발 좀 닫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샬롯이 말할 듯 말 듯 미묘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결국, 하인리시온의 집요한 시선이 다시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를 벗어난 후에도 하인리시온이 계속 캐물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지만.

    이후로도 에리스텔라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인리시온과 샬롯은 그녀를 화제에 올려놓고 온갖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에리스텔라가 자포자기하듯이 탁자 위에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나 잘못 판단한 거 같아…….’

    벌써 진이 빠졌다. 아무래도 샬롯에게 정체를 밝히면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소니아 너까지 동조하다니!

    오히려 위험하다는 신호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가 테이블에 고개를 푹 파묻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이런 이야기 나누니 재밌네요.”

    한창 즐겁게 떠들던 샬롯이 속 시원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에리스텔라가 사라지고 난 후에 이렇게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에리스텔라가 사라지고 난 후에 그녀와 관련된 화제는 대부분 한결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에리스텔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샬롯과 대화를 나누는 건 다른 기분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잘 지내고 있겠죠.”

    샬롯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더니 하인리시온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사람 있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을 거 같은 사람.”

    “…….”

    “에리스텔라가 저한테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인가 자꾸만 어디선가 제멋대로 잘 지내고 있을 거 같단 말이에요.”

    하인리시온이 옆에 있는 에리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있었네.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도 안 갔어요.”

    샬롯이 그리움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며 가볍게 웃었다.

    샬롯의 눈이 저택 내부를 꿰뚫을 듯 둘러보았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그러고는 여유롭게 차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소니아. 단순히 새 직장을 구경하라고 부른 건 아니지? 그럼 이곳에 있는 게 뭘까?”

    “샬롯 님.”

    “제발 그 호칭 좀 버리라니까. 나는 이제 오페라 가수잖아.”

    “노력해 볼게요.”

    “소니아는 고지식한 부분이 있다니까. 하긴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거겠지.”

    “네?”

    대화의 흐름을 끌고 나가던 샬롯의 눈매가 짓궂게 가늘어졌다.

    “소니아. 내가 황녀를 언제부터 봤다고 생각해?”

    “어릴 적부터…….”

    “응. 황녀의 마력 조절이 불안정할 때부터 봤어. 온갖 모습을 다 봤다는 거지.”

    샬롯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이 여우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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