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6)화 (36/123)
  • 36.

    “그리고 연회에서 대공 전하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감히 엿들었다고?”

    하인리시온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처음부터 엿들으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소니아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외치며 해명했다.

    “전하께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저는 함부로 말을 걸 수조차 없으니까요.”

    그래서 혼자 있는 틈을 기다리느라 하인리시온을 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들은 것이다. 하인리시온이 여우인 에리스텔라와 나누던 대화를.

    혹시나 정체를 들킬 만한 대화를 나누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다행히 없었다.

    다만, 하인리시온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그러니 소니아가 확신하게 된 것이다.

    “제게는 황녀 전하를 찾을 능력이 없으니, 찾을 수 있는 분의 행적을 지켜봤습니다.”

    “나를 염탐했다는 소리군.”

    “네. 저한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소니아가 곧은 심지를 가지고 대답했다. 자신의 행동에 하인리시온이 불쾌해해도 감당하겠다는 각오였다.

    “황녀 전하께도 말씀드린 적 없지만…… 사실 그분은 제 은인이십니다.”

    ‘……응?’

    소니아의 고백에 당사자인 에리스텔라가 가장 놀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소니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스스로 인생을 포기했을 때 제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저도 응당 갚아야지요.”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에리스텔라가 소니아에게 시녀 자리를 제안했을 때, 그녀의 눈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대로 떠나면 두고두고 신경 쓰이고 찝찝할 것 같아 잘사는 걸 직접 지켜보자 싶었었다.

    ‘그것도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런 건데.’

    소니아가 그걸 은혜라고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황녀 전하를 모시던 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습니다.”

    ‘헤헤. 그랬구나. 쑥스럽네.’

    에리스텔라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모습을 하인리시온이 흘겨보았을 때였다.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니아의 시선이 여우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황녀를 찾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했어. 하지만 나를 찾아온 건 무슨 이유지?”

    황궁 연회에서 무슨 대화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리스텔라가 대공저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여전히 소니아를 의심하며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싸늘한 태도에 소니아의 진심을 듣고 난 후부터 마음이 흐물흐물해져 있던 에리스텔라가 당황하며 쳐다봤을 때였다.

    “저는 황녀 전하에 대해 남들보다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소니아가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감추지는 못했다.

    마치 에리스텔라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 당당한 모습을 보자 하인리시온은 어쩐지 그녀에게 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 예전에 저한테 이야기 하나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예전 이야기에 하인리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여우가 나오는 이야기였지요.”

    에리스텔라가 움찔했다. 그녀가 말하는 게 언제인지 단번에 떠올라 버렸다.

    ‘그때 그건……!’

    으아. 그걸 왜 갑자기 말하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를 꺼내는 소니아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저 입을 어떻게 막나 발버둥을 칠 때였다.

    에리스텔라의 이상 행동을 눈치챈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덥석 붙잡았다.

    “쉿. 가만히.”

    안 돼. 참을 수 없어!

    에리스텔라가 자신의 귀를 막았다. 저 입을 막을 수 없다면 내 귀라도 막아야지!

    “황궁에 살던 여우가 한 소년을 만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에리스텔라가 술에 취해서 한 말이었다. 한마디로 주사였다.

    내가 그때 미쳤다고 술술 다 말해서!

    살짝 눈동자만 굴려서 하인리시온을 쳐다보니 그가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로 소니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네.”

    “그렇겠죠. 황녀 전하께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준 적 없다고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황녀 전하께서는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셨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황녀 전하와 대공 전하의 이야기라는 걸요.”

    소니아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여 정확히 여우를 향했다.

    “전하.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진작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보고 싶었어요. 전하.”

    살짝 떨리는 목소리. 붉어진 눈가. 그리움 가득한 눈동자가 일렁였다.

    오로지 에리스텔라를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응. 나도.]

    에리스텔라의 화답에 소니아의 눈이 커졌다.

    “목소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응. 그동안은 정체를 밝힐 수 없어서 참고 있었던 거야.]

    “사실 앞으로 귀찮은 일은 전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적당히 모른 척도 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소니아가 능청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곤란한 척 말했다.

    방금까지 느꼈던 감동이 와르르 무너지려는 순간 소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대로 다행이네요. 적어도 전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저항할 수 없이 마음이 요동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에리스텔라를 가장 그리워하고 기다려 주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일이었다.

    ‘어쩌면 다행인 것 같아.’

    에리스텔라는 여우가 되어서 더 좋은 일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아마 절대로 잊지 못하는 순간이리라. 그러니 에리스텔라는 오늘을 소중하게 기억했다.

    ***

    에리스텔라의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감동이 사라졌다는 건 아니지만…… 도저히 여운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알던 소니아와 너무 많이 달라진 거 같은데?’

    소니아와 아네사는 죽이 척척 맞았다.

    ‘부담스러운데?’

    이렇게 열렬한 애정을 언제 마지막으로 받아 봤더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다는 거다!

    그래도 소니아 덕분에 에리스텔라의 삶의 질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눈빛만 봐도 척.

    앞발만 들어도 척.

    에리스텔라의 취향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소니아의 활약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좋기는 좋은데. 소니아가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뀌었지?

    소니아의 적극적인 친절이 어색한 에리스텔라가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니 후회가 너무 많이 남더라고요.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부끄러운 게 뭐라고 그랬나 싶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전부 표현하려고 해요.”

    에리스텔라가 사라져 있었던 반년은, 소니아가 수없이 후회하고 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기대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잘해 드릴게요!”

    소니아가 눈을 빛내며 각오를 다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 고맙긴 고마운데. 왜 이렇게 몸이 간지럽고 털이 곤두서는 거 같지?

    소니아의 변화가 아직은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덕분에 확실히 앞으로 움직이는 데 한결 편해졌다. 다만, 소니아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가 남았는데…….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거예요.”

    소니아가 에리스텔라의 생각을 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허울뿐인 귀족이었으니까. 사교계에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거기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바라지도 않았고.

    [괜찮아.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대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분 더 있어요.”

    하지만 소니아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생각이 없다는 듯 대책을 꺼냈다.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교계를 누빌 수 있는 분이시죠.”

    소니아가 할 수 없는 영역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황녀 전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고 계시는 분이에요.”

    그 애도……?

    에리스텔라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장례식까지 치른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믿어 주는 사람이 더 있다니.

    기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소니아에 이어서 한 명 더 있었다.

    “아시잖아요. 겉으로는 가벼워 보여도 정작 가장 입이 무거운 분이라는 걸요.”

    소니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에리스텔라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애는.]

    에리스텔라가 사라지기도 전부터 더는 교류를 이어 가지 않고 있었다.

    그건 에리스텔라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만행으로 상처를 받았으니까.

    “아뇨. 그분은 여전히 황녀 전하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어요.”

    소니아가 확신에 차 말했다. 조금의 의심도 필요 없다는 듯이.

    “일단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제가 대공가로 방문해 달라고 얘기해 둘게요.”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녀는 소니아를 꽤나 좋게 봤었다.

    소니아를 마주칠 때마다 친근하게 장난을 치고는 했었는데, 정작 소니아는 불편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사이에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만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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