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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5)화 (35/123)
  • 35.

    “황녀 전하를 곁에서 모신 건 2년 정도 되어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대공 전하를 멀리서는 여러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이미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관계가 나빠진 상태였다.

    자연스레 공식적인 자리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의 교류는 단절되다시피 했었고, 시녀가 에리스텔라를 수행하면서 하인리시온을 접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래서 시녀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었다.

    “기억나는군.”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시녀를 떠올렸다.

    몇 년 전부터 에리스텔라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분명 에리스텔라가 실종되기 직전까지 측근이었던 시녀였지.

    “그래서 왜 찾아온 거지.”

    이미 에리스텔라의 시녀들은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황녀궁에는 더 이상 그녀의 시녀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황녀의 시녀라는 신분을 내세워 하인리시온을 찾아온 저의가 수상했다.

    시녀는 당돌하게 하인리시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 건국기념일 연회에서 전하를 뵀습니다.”

    “그래서?”

    하인리시온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을 때였다.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죠?”

    “……!”

    시녀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에리스텔라를 찾았다.

    소니아는 하인리시온을 앞에 두고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까지 아무 흔적도 없었던 황녀의 행방을 왜 나에게 와서 찾지?”

    “대공 전하. 제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못했습니다.”

    흠칫.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녀가 무슨 말을 듣고 찾아온 건지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오해가 생긴 것 같군. 황녀는 이곳에 없어.”

    “아뇨. 분명 있습니다.”

    소니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인리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거지.

    “분명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왔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지금 전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거겠죠.”

    “…….”

    “그럼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사람.”

    그녀의 눈이 빛났다.

    “저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소니아가 결연하게 다짐했다.

    “황녀 전하께 분명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저를 이곳에서 일하게 해 주세요.”

    소니아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당돌하게 부탁했다.

    에리스텔라는 그만 웃을 뻔했다.

    소니아는 황녀궁에서 일하던 다른 시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모두 좋은 가문의 영애들인 데다가 황실에서 고른 것과는 달리 그녀는 에리스텔라가 직접 데려온 시녀였다.

    소니아는 수도에 기반을 둔 다른 시녀들과는 다르게 변두리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몰락한 귀족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소니아는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만 가문과 가족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의무를 강요당하며 붙잡혀 있었다.

    언제든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늪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던 그녀에게 우연히 그곳에 방문했던 에리스텔라가 제안했다.

    ‘마침 내가 마음껏 부릴 사람이 필요한데 시녀가 되어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때, 소니아는 별 고민 없이 에리스텔라를 따라왔다. 그저 그곳을 떠나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에리스텔라의 시녀로 지내는 동안에도 그녀를 좋아하거나 헌신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리스텔라가 가장 가까이 두던 시녀이기는 했지만, 소니아는 언제나 에리스텔라의 말을 따르면서도 귀찮아하고 피곤해하면서 가끔은 잔소리까지 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에리스텔라가 사라지곤 난 후에는 미련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찾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제가 황녀 전하를 위해 찾아왔다는 것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몇 번을 말해도 내 대답은 같아. 황녀는 이곳에 없어.”

    하인리시온이 딱 잘라 말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소니아의 어깨가 아래로 쳐졌을 때였다.

    조금 전 로웬이 건넨 서류를 확인하던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소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대의 사정을 아니 기회는 줄 수 있어.”

    하인리시온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몹시 음흉해서 에리스텔라가 불안하게 바라봤다.

    ‘얘는 또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 거야.’

    ***

    “오늘부터 여우님의 전담 시녀가 된 소니아라고 합니다.”

    소니아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렇다. 하인리시온이 말한 기회는 바로 여우의 전담 시녀가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게다가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부담스럽게…….’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에리스텔라가 아는 그녀는 지금 모습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원래는 좀 더……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성격이었는데. 혹시 가면을 쓴 다른 사람이 아닌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우님이 좋아하실 만한 쿠션을 가져왔어요. 한번 앉아 보세요.”

    ‘쿠션이 거기서 거기…… 어? 이게 뭐야?’

    쿠션 위에 닿자마자 온몸이 사르르 녹을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에리스텔라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였다.

    닿자마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마음에 안정을 줘서 그녀의 이불과 베개에 모두 사용하고는 했었다.

    에리스텔라가 쿠션에 얼굴을 묻고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소니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에리스텔라는 고민했다. 과연 소니아를 믿어도 될까.

    ‘우선 확인해 보자.’

    신중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과연 그녀가 어떻게 하인리시온의 곁에 황녀 에리스텔라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건지.

    그런데…….

    ‘시녀가 천직이었나?’

    소니아의 손짓에 에리스텔라는 몇 번이나 천국을 다녀왔다.

    에리스텔라의 취향을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척척이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그다음에는 감탄했고 결국에는 살살 녹았다.

    ‘편하다.’

    황녀 에리스텔라일 때도 소니아가 가장 편하기는 했었다. 별말 없이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 에리스텔라의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네.’

    어느새 두 사람의 모습은 과거 황녀 에리스텔라와 시녀였을 때와 같았다.

    ***

    하인리시온이 소니아를 에리스텔라의 전담 시녀로 둔 것은 그녀를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인리시온은 소니아를 수상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그녀가 수상한 자라면 마음껏 티를 내보라는 뜻이었다.

    그녀를 감시하는 이들을 저택 곳곳에 심어 두었고 역시나, 소니아는 움직였다.

    ‘그래도 에리스텔라 사람이었으니, 한 명쯤은 제대로 된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거는 바람일 뿐, 그런 희망에 끌려다닐 수는 없는 일이기에.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에게도 비밀리에 사람을 붙인 뒤, 그녀가 밤마다 남몰래 움직인 흔적을 잡았다.

    결국, 소니아가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앞에 끌려 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소니아가 뭔가를 잘못했나?’

    에리스텔라가 빠르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니아.

    그를 매섭게 지켜보고 있는 하인리시온과 로웬.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거지?”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저택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증거가 있다.”

    소니아의 수상한 행적이 여럿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여우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에리스텔라를 배려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충격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소니아가 정말 세작이라고 해도 이렇게 허술하게 들킬 리가 없는데.’

    소니아는 침착하고 치밀하다. 에리스텔라가 갖지 못한 성격이기에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쉽게 꼬리를 밟힌다고?

    차라리 들켜도 상관없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럼 이유가 뭐지?’

    에리스텔라가 의아해하며 소니아를 향해 시선을 보냈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은 소니아의 거짓말을 놓치지 않고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건국기념일 때 나를 봤다고 했지. 그런데 나는 분명 영애를 본 기억이 없는데.”

    하인리시온이 슬쩍 에리스텔라에게 시선을 돌려 확인했다. 에리스텔라가 소니아를 본 적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는 그때 정식 초대를 받지 못해 황궁 하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소니아는 처음 끌려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담담한 태도로 답했다.

    에리스텔라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하녀는 연회장의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기에 있어도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보이지 않았던 거구나.

    소니아는 황궁 연회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참석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목적은…… 에리스텔라였나 보다.

    소니아가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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