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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4)화 (34/123)
  • 34.

    하인리시온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여우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닿아 있던 얼굴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로 향한 하인리시온은 로웬을 불러 지시했다.

    “지난번에 이야기해 뒀던 마력석을 가져오도록 해.”

    “그걸 전부 말입니까?”

    로웬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일정한 톤을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 전부.”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아니면 자다가 발차기를 잘못해서 바닥이라도 꺼졌나.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데굴데굴 흔들렸다.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이걸 두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그도 그럴 것이 에리스텔라의 앞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석이 쌓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누, 누가 내 볼 좀 꼬집어 줘!

    에리스텔라의 동그랗게 커진 눈이 하인리시온을 향했다.

    ‘설마 전부 나 주는 거야?’

    에리스텔라의 눈가가 떨렸다. 아무래도 정황상 그런 거 같은데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에리스텔라에게 마력석이 필요했으니까. 하인리시온에게 말을 꺼내려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말도 꺼내기 전에 눈앞에 생겼으니까!

    하인리시온의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며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그의 입술이 느른하게 열렸다.

    “이거 전부 네 거야.”

    ‘역시!’

    눈앞에 빛이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이걸로 마력이 늘어나는지 궁금하잖아?”

    하인리시온은 이미 에리스텔라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매끄럽게 쭉 올라간 입꼬리가 뿌듯해 보이기도 하는데.

    “도와줄게.”

    하인리시온이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혹시 다른 데도 이상해지고 그런 거 아냐? 너무 좋아서 정신이 어질어질했던 에리스텔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자세히 살폈다.

    오늘따라 하인리시온의 웃음이 생글거리는 것 같았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거 같지만…….’

    에리스텔라가 몸을 날려서 마력석을 폭 끌어안았다.

    일단 필요한 거니까. 고맙게 잘 받을게. 히히힣.

    에리스텔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줬다가 뺏어 갈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며 에리스텔라가 캥캥 외쳤다.

    “대체 그걸 어디에다 쓰시려고 이렇게 끌어모으신 건지.”

    물론, 이 마력석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로웬의 말할 수 없는 고생이 있었지만.

    “저게 다 얼마야……. 내 손이 다 떨리네.”

    로웬이 하인리시온의 뒤에서 눈물을 훌쩍 흘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에리스텔라는 모른 척 마력석을 더욱 소중하게 품었다.

    ***

    에리스텔라는 하루 종일 하인리시온의 침실에만 있었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이 집무실로 떠난 뒤, 혼자가 되고 나서야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연적으로 회복된 마력의 양은 오랜 시간 동안 먼지 한 톨 정도 쌓이는 것에 불과했다.

    좀 더 눈에 띄는 양을 제대로 흡수하려면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집중하자. 집중!’

    마력석을 꼭 쥐고서 눈을 감고, 마력석 안에서 진동하는 마력을 느꼈다.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마력이 공기처럼 여우의 몸을 감싸고 흡수되도록.

    혼자서 그렇게 몇 시간을 집중해서 시도했을 때였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에리스텔라가 떨리는 손과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심장에 손을 가져갔다.

    ‘……서, 성공이야.’

    분명해. 절대 착각이 아냐.

    ‘지금 내 몸에…… 마력이 생겨났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이 정도면 더 많은 시간 동안 목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쉽게 지쳐서 쓰러지지도 않을 거고.

    효과가 있어!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희망이라는 빛이 반짝였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실마리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해.’

    결국, 아주르디 백작 부부를 계기로 흑마법이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정체를 숨기던 흑마법사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만약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 그녀가 여전히 여우의 모습이라면…….

    ‘큰일이야.’

    여기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뭐라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알아내야지.

    에리스텔라는 그 후로 마력석을 이용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이어 나갔다.

    역시나 마력석을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조건과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한 번에 많은 마력을 흡수할 수는 없었다.

    여우의 몸으로 흡수할 수 있는 마력석은 고작 하나. 마력의 양은 30분 가량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효율을 따지자면.

    ‘최악이지.’

    그 비싼 마력석으로 고작 30분 대화라니.

    이건 누가 봐도 손해 보는 장사였다. 하지만 에리스텔라에게는 그것마저도 값진 결과물이었다. 그러니까…….

    ‘아껴 써야지.’

    정말 필요할 때에만 써야겠다. 에리스텔라는 마력석을 아주 소중하고 꼼꼼하게 숨겨 두었다.

    그 모습이 하인리시온이나 고용인들이 보기에 마치 다람쥐가 입안에 도토리를 잔뜩 넣어서 비밀 장소에 숨기는 것 같아 보였지만, 에리스텔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움직였다.

    ‘마력석을 이용해 어느 정도 마력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아직 부족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여우 대신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에리스텔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하인리시온이 유일했다.

    대공가에 있는 고용인들이 여우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들이 황녀 에리스텔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고 하인리시온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주인이니까.

    에리스텔라에게 필요한 건 그녀의 수족 같은 존재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되고 나니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혼자구나. 라는 쓸쓸하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여기서 다시 막혀 버렸네.’

    에리스텔라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있는 건가?”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하인리시온이 다가와 물었다. 고민에 빠져 있는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력석이 더 필요하면 말해. 가져다줄 테니까.”

    그만의 응원이었다. 그러자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정말? 진짜지?]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하인리시온의 얼굴도 태울 수 있을 정도의 기세였다.

    “이제는 별로 힘들지 않나 보네?”

    하인리시온이 지난번보다 더 또렷하고 편안하게 들리는 에리스텔라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물었다.

    [덕분에. 마력이 어느 정도 쌓이니까 목소리 정도는 원할 때마다 낼 수 있어.]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지 않도록 조심해.”

    [당연하지. 그나저나…….]

    에리스텔라가 가느스름한 눈매로 하인리시온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몰랐는데…… 의외로 좋은 사람이구나?]”

    “뭐?”

    [앞으로 잘 부탁해.]

    순간 하인리시온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래도 나 말실수한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열띤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한 하인리시온이 후회하려고 하자.

    [아냐! 이미 내뱉은 거 도로 못 삼켜. 마력석 또 주는 거다?]

    “…….”

    하인리시온의 눈동자가 천천히 먼 허공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게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그 덕분에 고민하던 문제와는 별개로 무척이나 든든해졌다.

    에리스텔라가 배부른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때였다. 노크와 함께 애매한 얼굴로 들어온 로웬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보고했다.

    “전하. 약속을 잡지 않은 손님이 오셨는데,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방문하라고 해.”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황녀 전하와 관련이 있는 분이라서요.”

    “누군데 그러지?”

    ‘그러게. 누구야 도대체?’

    에리스텔라도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궁금해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

    선약 없이는 아무나 쉽게 찾아올 수 없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혼자서 들이닥친 손님은 지금 응접실에서 하인리시온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어깨 위에 여우 한 마리도 함께였다.

    “누구라고?”

    “황녀궁에서 일했던 소니아라고 합니다.”

    하인리시온이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에리스텔라를 흘깃 쳐다봤다.

    네가 아는 사람이 정말 맞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이미 소니아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갈색 머리와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검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를 에리스텔라는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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