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인리시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방금 귓가에 정확히 에리스텔라가 하는 말이 들렸다.
어떻게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방금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입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에 애써 목에 힘을 주었다.
여우의 몸으로 에리스텔라 황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대로 움직였다. 그래 봐야 바람 빠진 소리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줄 알았는데.
방금 에리스텔라의 귀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어……? 이게 정말 되는 건가?’
에리스텔라는 사실 놀라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해 본 건데 정말로 하인리시온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지내게 되면서 하인리시온의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그의 마력이 조금씩 그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작동 불가능하던 마력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해 본 것이었다.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보려고 힘을 주는데…… 그대로 에리스텔라가 픽, 쓰러졌다.
***
알록달록한 솜사탕 구름이 지평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여우의 발이 구름에 닿자마자 폭신폭신. 말랑말랑.
여우의 발이 솜사탕 구름에 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멜로디는 점점 더 커졌다.
에리스텔라는 솜사탕 구름이 나오는 꿈이 너무 좋았다.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여기서 뛰어노는 동안 점점 힘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놀면 놀수록 지치기는커녕 더 신이 났다.
‘아. 좋다…….’
솜사탕 구름에 등을 대고 벌러덩 누운 여우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내려갔다.
끔벅끔벅.
에리스텔라가 몸을 쭈욱 늘렸다.
‘엄청 푹 잘 잤나 봐. 대체 얼마나 잔 거지?’
개운하게 몸을 일으키며 생각하던 에리스텔라가 멈칫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잠들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을 되짚다 보니…….
하인리시온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분명히 목소리가 나와서 하인리시온에게 전달이 됐었다.
‘얼떨떨해서 놀랐던 것까지 기억나. 그다음에…….’
나 쓰러졌었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도 그저 상쾌할 뿐 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보니 익숙한 천장과 샹들리에.
침대의 이 푹신하고 말랑거리는 감촉. 눈앞에 보이는 가구들.
‘어……?’
여기 되게 익숙한데?
에리스텔라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리고 주변을 재빨리 확인했다. 역시나 익숙하다.
특히,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흠집! 그야 저건 내가 만든 거니까!
여기는 하인리시온의 침실이었다.
‘쓰러지고 난 후에 여기로 데려다 놓은 건가.’
누가 여기로 데려왔지. 설마 하인리시온이?
쓰러질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그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이제는 내가 여기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걸까.’
혹시 에리스텔라를 여기에 두고 하인리시온이 여전히 집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게 아닐지 신경 쓰였다.
에리스텔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일단…….
‘반갑다. 침대야.’
여우가 갑자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갑자기 폴짝 뛰어 점프하고는 이불에 얼굴을 푹 묻었다.
기분 좋은 갸르릉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침대가 아닌 복도 바닥이나 도서관 책상 같은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는 했었다.
푹신한 감촉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물을 담은 대야를 가지고 들어오던 고용인이 자리에서 일어난 여우를 발견했다.
“여우님께서 깨어나셨어요!”
고용인이 당장 복도로 나가 외쳤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저택 내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기까지는.
어느새 그들은 여우가 있는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훌쩍거리는 이까지 있었다.
“여우님. 괜찮으세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고용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틀 만에 일어나셨어요…….”
이틀?!
내가 그렇게 오래 잤나.
그래서 고용인들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였구나. 하루가 아니라 이틀이라서.
그때였다.
“잠시만요. 제가 상태를 좀 확인하겠습니다.”
누가 불렀는지 어느새 의사까지 와 있었다.
“다들 비켜요! 여우님이 건강하신지 확인해야 해요!”
아네사가 나서서 길을 만들었다. 그 사이를 헤치고 들어온 의사가 여우의 상태를 조심스레 확인했다.
“갑작스레 몸에 무리가 와서 혼절하신 거였습니다. 잘 쉬기만 하면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의사가 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리스텔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나서야 고용인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단둘이 남았을 때야 겨우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에리스텔라가 이번에도 목소리를 내 보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바람 빠진 히이잉-하는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지금은 안 되나 보네. 뭔가 몸은 개운하지만 힘이 모이지 않고 새어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몸 안에서 마력이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는데…….’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황녀 에리스텔라였을 때 느껴지던 마력과는 너무 달랐다. 언제나 넘쳐흐르는 마력만 품고 있었기에 너무나 어색했다.
‘내 착각인 줄 알았어.’
그저 다 빠지고 남은 마력의 찌꺼기 정도인 줄 알았다.
‘그때는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냥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을 뿐이었어.’
그런데 실현이 된 것이었다.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좀 알아봤어. 네 몸에 마력이 돌고 있는 것 같아.”
역시나였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분명 마력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가능했던 건지 의문이었다.
“네 원래 마력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조금씩 회복됐던 것 같아.”
‘……?’
“원래 마력이 가득했던 그릇이니 주변에 흐르는 마력을 스스로 에너지화할 수 있었던 거고.”
하인리시온이 밤을 새워 가며 마력 사용에 관한 사례를 찾아본 결과 알아낸 내용이었다.
이것 역시 몇 백 년 동안 단 한 건의 사례가 유일했다.
하인리시온은 자신이 알아낸 내용을 더욱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강한 마력을 지닌 사람의 주변에는 어떠한 기운이 흐르기 마련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온 이후로 에리스텔라는 많은 시간을 하인리시온의 곁에서 보냈다.
자연스레 하인리시온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우의 몸에도 조금이지만 차곡차곡 마력이 쌓여 하인리시온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은 그 마력이 미약하고 여우의 체구가 쓸 수 있는 양이 제한적이라서 고작 한마디만으로도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진 것이었다.
‘적응 안 된다…….’
에리스텔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족한 걸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야 쥐꼬리만큼의 마력도 간절해지다니.’
에리스텔라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제국에서 가장 방대하고 강력한 마력을 지녔었다.
마력이 부족해서 고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몸속에 흐르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약하고 가는 마력이 낯설었다.
‘에이구, 내 신세야.’
그래도 엄청난 발견이었다.
무한대로 쓸 수는 없어도 하인리시온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조금만 더 마력이 쌓이면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데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
에리스텔라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지난 며칠 동안의 상황을 정리 중이었다.
아직 흑마법을 푸는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진척은 있었다.
콩알만큼이라고는 해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일단 당분간은 아델라시아 대공가를 떠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그럼 조금만 더 하인리시온의 옆에서 마력을 채우면서…… 근데 마력을 더 빠르고 많이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려나.
‘엇. 그럼 마력석을 이용하면 마력을 더 채울 수 있는 거려나?’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어차피 소용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된 상황에서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짝였다.
‘이건 확인해 봐야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곧바로 황녀궁에서 가져왔던 자신의 마력이 담긴 물건을 꺼내 확인했다.
이것만 되면 여우의 몸이라는 제약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에리스텔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곧, 에리스텔라의 긴 속눈썹 아래에서 흔들리던 눈동자가 당혹으로 그늘졌다.
‘……왜?’
왜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