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0)화 (30/123)

30.

‘……어색해.’

에리스텔라는 눈치를 보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힐끔 하인리시온을 쳐다봤다. 그러다 여전히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과 딱 마주쳤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여기서 적당히 상황을 수습하려면 하인리시온에게 다가가야 할 거 같은데.

‘으, 부담스러워.’

하인리시온의 눈빛이 너무 따가웠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잠깐 외출을 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중앙 현관으로 나가려고 하니 경비병들이 위험하다고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 하는 수 없이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벽을 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작은 개구멍을 찾았을 뿐인데…….

아이고오. 내 신세야. 왜 내가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지.

기가 막혔지만 별수 없었다.

‘일단 여기서 더 오해가 깊어지지 않도록 해명을 좀 해야겠지.’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곧바로 멈춰서 눈치 한 번 봤지만 말이다.

다시, 한 걸음 내딛고 아닌 척 뒤 한 번 돌아보고. 이번에는 용기 내서 두 걸음 빠르게 내달려 보았다.

어느새 하인리시온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이거. 이번에 새로 개발한 디저트인데 괜찮더라고.”

하인리시온이 보기 좋은 디저트가 담긴 그릇을 툭 내밀었다.

어라? 갑자기 이건 무슨 뜻이지?

설마 이걸로 나를…… 에리스텔라의 의심 가득한 눈매가 가느스름해졌을 때였다.

“안 먹을 거면 가져가라고 하고.”

‘음식은 잘못 없는데 왜 구박이야. 먹을 거야.’

에리스텔라가 앞발로 그릇을 쭈욱 당겨 왔다. 그리고 한 입 크게 먹는데.

‘너무 맛있잖아…….’

에리스텔라의 눈이 흐물흐물 풀리면서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을 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불쑥 말했다.

“그사이에 털이 엉켰네.”

‘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에리스텔라는 맥이 풀렸다.

최근에는 고용인들과도 오래 있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털도 엉켜 있었다.

“빗어야겠네.”

하인리시온이 아무렇지 않게 빗을 가지고 와서 털을 빗기 시작했다.

어? 어어……?

자연스럽게 엉킨 털을 풀면서 빗을 쭉 빗었다.

‘아앗!’

아파! 엉킨 털이 당겨지면서 엄청난 통증이 따라왔다. 이거 감정 실은 거지?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사나워지며 하인리시온을 노려보았다.

“미안. 안 아프게 할게.”

하인리시온이 옆에 있는 오일을 덜어내 여우의 털에 조심스레 발랐다. 그러고 나니 빗질을 해도 조금 전과는 달리 엉키지 않고 부드럽게 빗겨졌다.

에리스텔라의 긴장하고 있던 몸이 조금씩 나른해져 갈 때였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 말인데.”

움찔. 에리스텔라의 등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어떻게 해서 흑마법에 연루되신 건지.”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게 됐지?’

역시 지난번에 아주르디 백작 때문인가.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깐 모른 척할까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너는 모든 오해를 끌어안으면서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어.”

그동안 원망했던 시간들이 물밀 듯이 밀려와 후회되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 주지 그랬어.”

‘……미안해.’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에 대해 말해 줄 수 없었다.

지금처럼 충격받아 괴로워할 걸 알았으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대한 자긍심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는 다정하고 좋았던 부모님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부디 오지 않기를 바랐다.

자책 어린 에리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하인리시온은 속이 뒤집히는 심정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리고…….

“고마워.”

하인리시온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

에리스텔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랐다.

“나와 아델라시아 가문을 생각해 준 거잖아.”

그렇기에 하인리시온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었던 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르게 되면 어떻게든 알려졌을 테니까. 그전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정리하려고 한 거. 이제는 알겠어.”

그녀의 막무가내였던 행동들은 전부 아델라시아 가문과 하인리시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모든 오해를 감당한 거고.”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에리스텔라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은혜를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번 그의 조카의 경우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에 막무가내라고 여겨졌던 황녀 에리스텔라의 행동들에는 알고 보니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러면서 단 한 번도 해명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럴까.

왜 오히려 미움을 받고 싶은 사람처럼 구는 걸까.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라는 사람을 알고 지낸지 15년.

한때는 그녀와 가까이 지냈었다.

철없고 제멋대로지만 싱그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던 소녀.

그 소녀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누구든지 사랑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한때는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거창한 생각을 하고 도와준 게 아닌데.’

하인리시온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에리스텔라는 어쩔 줄 몰랐다.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와는 에리스텔라도 인연이 있었다. 어릴 때 그들이 에리스텔라를 잘 챙겨 주기도 했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오해 하나 더 받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괜찮았다.

하인리시온이 그녀한테까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혹시 제국에 해가 되는 짓을 저지른 건 아닌지.”

하인리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감당할 생각으로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에리스텔라 역시 하인리시온이 더 이상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하인리시온에게 자기 마음을 전할 방법은 너무나 적었다.

의자 위로 한 번 뛰어오르고, 그다음에 책상 위로 폴짝 뛰어 올라온 에리스텔라는 펜을 잡았다.

그녀는 이미 몇 번 앞발로 펜을 잡고 글씨를 쓴 적이 있지만, 여전히 서툴고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최선을 다해 글을 썼고, 그것에 진심이 묻어나기를 바랐다.

하인리시온 역시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종이로 옮겼다.

- 하인리시온.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하인리시온이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를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두 사람은 하인리시온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니까.

- 선대 대공 부부는 나쁜 마음으로 흑마법과 손을 잡은 건 아니었어. 그때 대공비의 몸이 너무 안 좋았어.-

원래도 그리 몸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대공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분에 하인리시온이 태어난 후로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시피 지냈었다.

하지만 완치는 아니었기에 결국엔 문제가 찾아왔다. 대공비에게는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부와 권력이 있어도 불치병은 고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델라시아 대공은 부인을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치료법을 알아보던 중 하나 남은 희망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필, 흑마법이.

평소라면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대공이었지만 그 당시에 그는 절박했다.

평생을 지켜 온 신념과 자부심을 모두 무너트릴 만큼.

흑마법에까지 손을 댔지만 그들의 기대만큼의 진척은 없었다.

그래도 대공비는 처음엔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믿었다.

이대로만 한다면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가 되면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죗값을 치르겠노라고.

하지만 일시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었을 뿐, 대공비의 건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흑마법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는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에리스텔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흑마법을 증오하고 절대 용서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두 사람의 사정을 알고 나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대공비는 물론이고 대공까지 흑마법 부작용이 심각해 에리스텔라마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에리스텔라가 뒤늦게 찾아갔지만 두 사람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마지막 유언을 들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것만큼은 하인리시온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에리스텔라가 펜을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디 이 마음이 하인리시온에게 닿기를 바라며 힘겹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너를 걱정했어.]

이번에는 진짜 에리스텔라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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