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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9)화 (29/123)
  • 29.

    ***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지하실 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브스 지역에서 피어났던 꽃은 디케이든 후작이 중요한 약초로 쓸 수 있다며 은밀하게 심으라고 지시했었던 거지.’

    약초의 가치가 알려지면 경쟁이 생길 수도 있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피어난 꽃처럼 광장 곳곳에 심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디케이든 후작의 행적을 추적하며 수상한 구석이 없는지 조용히 지켜보다가 알게 됐었는데.’

    아무리 친분이 두터운 관계라고 해도 디케이든 후작이 아델라시아 대공가를 방문하는 횟수는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디케이든 후작가는 의학으로 유명한 가문이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그 당시 대공은 저명한 의사들을 모두 만나고 다녔으니까.’

    혹시라도 디케이든 후작이 자신이 잘 아는 약초를 흑마법에 이용해 아델라시아 대공에게 접근했을까 봐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확인하러 갔던 건데.’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결국,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에리스텔라는 디케이든 후작의 횡령 문제를 찾아내 몰아냈었다.

    ‘그때 디케이든 후작을 흑마법에 대해 알아내기 위한 미끼로 쓰려고 적당히 놓친 척한 게 실수였어.’

    그 덕분에 흑마법사들에 대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에리스텔라가 이 꼴이 되는 바람에 완전히 놓쳐 버린 게 큰 패착이었다.

    ‘하인리시온에게 붙잡혔으니 더는 아무 짓도 할 수 없겠지.’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집무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하인리시온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긴 곳은 선대 대공 내외가 지내던 방이었다.

    하인리시온은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이곳을 그대로 남겨 두었지만 그동안 들어오지 못하던 공간이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 못 느끼겠어?”

    하인리시온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로웬에게 눈짓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그저 다른 방에 비해 선대 대공 전하의 연구 자료가 많이 있는 것 말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로웬이 뒷말을 흐리자 하인리시온이 바로 반응했다.

    “왜? 뭐가 이상해?”

    “어…… 아뇨. 딱히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로웬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방 곳곳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뭔가가 걸린다는 듯이.

    “분명 이상한 점은 없는데…… 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거죠. 제가 뭘 놓치고 있는 겁니까?”

    로웬이 미간을 좁힌 채 방안을 몇 번이나 둘러보지만 도저히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나도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이 방이 가지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를.”

    하인리시온이 방 한 벽면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연구 자료와 재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중에 없는 재료가 있다는 걸 말야.”

    “……없네요. 마력석이.”

    하인리시온의 말에 불안한 시선으로 진열되어있는 마력석을 확인한 로웬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정확히는 살아 있는 마법사가 만든 마력석이 없어.”

    살아 있는 마법사의 마력석은 다른 마력석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건 전부 아델라시아 가의 선조들이 남겨 놓은 마력석과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력석뿐이야.”

    그동안 구분할 일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 차이가 가지는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고 명확했다.

    로웬과 하인리시온은 동시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마력석을 떠올렸다.

    마법사가 만든 마력석은 비교적 귀한 물건이라 그게 없다고 해서 이상함을 눈치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얼마 전,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사건이 있었기에 그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내 부모님에 대해 과연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하인리시온과의 교류가 드물었다.

    하인리시온은 여러 전장을 떠도는 일이 많았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도 이전과는 다른 어색함이 감돌았었다.

    그러니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인리시온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어릴 적 그가 알던 부모님은 강한 신념과 자부심을 지닌 분들이었다. 옳고 그름이 확실하고 인정이 넘쳤다.

    게다가 하인리시온의 기억 속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는 그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모두 추정일 뿐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증거가 없으니까.”

    “네. 전부 정황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 추정 역시 전부 사실이 아닐…….”

    로웬은 신중하게 다시 상황을 살펴보고 판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자신이 가져온 보고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인리시온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웬.”

    하인리시온이 담담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열심히 말을 잇던 로웬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네? 그게…….”

    로웬이 차마 긍정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나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로웬이 갖고 온 정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게 아니라 다른 사연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 않아.”

    모든 정황이 그리고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로웬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떨궜다.

    “네가 왜 죄송해. 너는 내 명에 따라 능력을 보여 줬을 뿐인데. 잘했어.”

    “…….”

    하지만 로웬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만했다. 어쩌면 하인리시온보다 로웬이 받은 충격이 더 클 테니까.

    하인리시온은 의외로 놀랄 만큼 담담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오하고 있었나 싶을 만큼.

    “이걸 에리스텔라는 전부 알고 있었던 건가.”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인리시온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황상 아마도요.”

    로웬이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제야 에리스텔라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갑자기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일에 끼어들었던 막무가내 황녀.

    그녀는 장례를 치르고 모든 흔적이 남지 않도록 정리해 놓았었다.

    그때는 그녀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에게 한 짓을 감추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하인리시온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반대였어.’

    하인리시온과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장례가 지연되면 그만큼 흔적이 남고 누군가는 진실을 알게 될 수 있기에.

    그렇게 되면 오랜 역사의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하인리시온 역시 흑마법과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벗지 못할 것이었다.

    ‘오히려 나를 믿어 주었던 거였나.’

    에리스텔라는 단 한 순간도 하인리시온이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의 오해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

    하인리시온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보좌관들이 하나둘씩 집무실로 들어서고 업무를 시작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내내 에리스텔라가 맴돌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 길어지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일이 많지 않으니 일찍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하인리시온의 혼란을 알고 있는 로웬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아냐. 일은 끝내야지.”

    그때까지 잠시 미뤄 두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하인리시온이 애써 서류를 보려고 할 때였다.

    “어엇. 이러다 다쳐요. 조심하세요.”

    “힘들면 제가 안을까요? 저한테 주세요.”

    “무슨 말이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도착할 때까지 제가 모실게요.”

    “그럼 이쪽으로요. 제가 문 열게요!”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갑자기 문이 크게 흔들리며 열렸다.

    고용인들 여럿이 놀란 얼굴을 하고서 하인리시온을 찾아왔다.

    ‘이거 아니야. 일단 나 좀 놔 봐! 왜 여기로 오는 거야!’

    품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여우를 안고서.

    무슨 일이지?

    하인리시온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고용인들을 향해 묻자 곧바로 대답이 떨어졌다.

    “여우님께서 현관 앞을 헤매고 계셔서 저희가 모셔 왔습니다.”

    고작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그게…… 이유는 모르겠는데, 여우님이 자꾸 밖에 나가고 싶어 하시는 눈치라서요. 아무래도 전하와 함께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모셔 왔어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여우가 가출하려고 한 것 같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걸 고용인들이 발견하고 붙잡아 하인리시온에게 데리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실수로라도 혼자서 저택 밖으로 나갔다가 못 돌아오시면 큰일이잖아요.”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다고?”

    하인리시온의 물음은 고용인이 아니라 에리스텔라를 향해 있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에리스텔라가 중간에서 앞발을 열심히 흔들었지만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네. 그러니 전하께서 좀 더 살펴 주세요.”

    하인리시온에 에리스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잘 보도록 하지. 다들 물러나 있어.”

    “저희도요? 저희는 여기서 여우님을 좀 더…….”

    ‘잠깐만. 다들 여기 있어도 괜찮아! 그냥 여기서…….’

    “네. 나가 보겠습니다.”

    에리스텔라의 소리 없는 외침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하인리시온의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에 아네사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물러났다.

    결국,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단둘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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