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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8)화 (28/123)
  • 28.

    그 안에는 처참한 몰골로 팔다리가 묶인 디케이든 후작이 보였다.

    그 역시 하인리시온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빛냈다.

    “오랜만이구나. 하인리시온. 네가 이렇게 컸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불필요한 대화는 생략하시죠.”

    하인리시온은 디케이든 후작과 옛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너는 여전히 긍지가 높은 아이구나.”

    그는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수세에 몰린 이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부디 그 긍지가 꺾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참 걱정이로구나.”

    여전히 어린 날의 하인리시온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황녀마저 없는 네가 과연 버틸 수나 있을까.”

    하인리시온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하지만 곧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꽤 흥미가 가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갑자기 에리스텔라를 언급하는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디케이든 후작의 말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어디 한번 더 지껄여 보시라. 하인리시온이 경고했다.

    “참으로 부럽구나.”

    “…….”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고결함에 흠집 한 번 없었다니. 완전무결하다고나 할까요.”

    디케이든 후작이 말투를 바꿔 비아냥거렸다.

    “전하.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인 겁니까.”

    “…….”

    갑자기 디케이든 후작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초점이 또렷하게 잡혔다.

    그가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전부 오물에 빠진 것처럼 역겨운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하는 말들이 신경 쓰였다. 기분 나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더는 장난질 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기회 따위 없을 겁니다.”

    하인리시온이 싸늘하게 경고했다.

    디케이든 후작은 일부러 하인리시온을 도발하려 작정한 듯싶었다.

    “왜? 무서워지기라도 했어?”

    “……또 헛소리군.”

    “헛소리이길 바라겠지. 근데 헛소리가 아닐까 봐 무서운 거야. 듣고 싶지 않은 거고.”

    킬킬킬.

    지금까지 정중한 어조로 말하던 디케이든 후작이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것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어 대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하인리시온의 신경을 자극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를 처리하라고 신호를 보내려고 할 때였다.

    붉게 충혈된 디케이든 후작의 눈이 하인리시온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내외는 참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러니 지금 대공께서도 부모를 존경하려나?”

    디케이든 후작의 도발은 한층 더해졌다. 하인리시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존경하고 싶으면 굳이 알려고 하지 마. 그냥 탓할 수 있는 사람을 탓하고 원망해. 네가…….”

    하지만 디케이든 후작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도발하는 동안 하인리시온이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날카로운 검이 디케이든 후작의 목을 정확하게 노렸다.

    이제는 시체에 불과한 그를 덤덤하게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충분히 대답이 됐어.”

    디케이든 후작은 하인리시온에게 알려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자체로 진실을 알려 주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에는 명예롭지 못한 일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 알아야 했다.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해도 그 역시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게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주인인 하인리시온의 몫이었다.

    “로웬.”

    “네.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하인리시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로웬은 바로 알아들었다.

    차라리 숨기고 묻어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기나긴 지옥을 끝내고 싶었다.

    ***

    ‘역시 아주르디 백작가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구나.’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던 중 에리스텔라는 로웬이 누군가를 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하인리시온과 함께 지하실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능하면 끝까지 몰랐으면 하는데.’

    아마 포기하지 않겠지.

    조금씩이지만 하인리시온이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에리스텔라 역시 아주르디 백작가와 디케이든 후작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당시 에리스텔라가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이상을 눈치채게 된 것도 디케이든 후작을 먼저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시작은 아브스 지역에서의 그 사건이었지.’

    ***

    하인리시온은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로웬을 향해 물었다.

    “지난번 그건 조사 결과가 나왔어?”

    하인리시온은 디케이든 후작을 만난 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동안 에리스텔라의 실종 당일이나 선대 대공 부부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 알아봤지만 마땅히 나오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서 다른 걸 알아보도록 지시했었다.

    로웬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는 듯 조사한 자료를 바로 가져왔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녀 전하께서 실종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선대 대공 부부가 사망하기 전부터 에리스텔라가 실종되던 그날까지 그녀가 일으킨 작은 전투나 소동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조사는 성과가 있었다.

    “이미 몇 년이 지난 일이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가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건 어려웠습니다. 다만, 황녀 전하께서 일으켰던 소동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니 의심 가는 정황이 포착되기는 했습니다.”

    로웬이 찾아온 것은 에리스텔라가 그동안 벌여 온 수많은 소동 중 몇 가지였다.

    “그중 가장 오래된 일은 황녀 전하께서 열여섯이시던 해, 가출 소동을 벌였던 사건입니다.”

    “가출 소동이면…… 아브스 지역인가.”

    정확히는 단순히 외출했을 뿐인데 일주일 넘게 돌아오지 않아서 가출이란 오해를 받은 거였지만.

    “네. 그 기간 동안 아브스 지역에서 광장 하나를 불태워 버리시는 바람에 문제가 됐었죠.”

    당시, 그 사건을 접한 이들은 하나같이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충격을 금치 못했었다.

    하인리시온도 그때까지만 해도 에리스텔라와 잘 지내고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실에서 보상 문제를 논했었지.”

    “그 당시에는 황녀 전하의 가출 소동이 워낙 큰 회자가 되어 다른 사소한 문제들은 그대로 묻혔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문제가 있었던 거고?”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에리스텔라에게 모든 문제가 집중되어서 어째서 거기에 갔는지, 하필이면 왜 광장에 불을 질렀는지에 대한 진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럼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번에 자세히 알아보니 그 당시 광장이 불타기 1년 전부터 특이한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아름다워서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정보였다. 사실 에리스텔라의 소동이 아니라도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전달될 리 없기도 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그 당시에 광장에서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고는 했답니다.”

    “우연의 일치일 리 없지.”

    하인리시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 당시야 그저 사람들이 광장을 많이 찾고 기분도 들뜨니 그러는 거라고 여겼다네요. 게다가 그 사건이라는 게 좀 특이하기도 해서요.”

    “어떤 사건이었던 거지?”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웃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애정 표현이 과격해지거나 폭력성이 짙어지는 등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미 짐작을 하고 들으니 로웬이 갖고 온 정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벌인 짓이었다.

    과한 애정 표현 같은 자잘한 사건이 섞여 사람들은 광장에 문제가 있다고는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 광장이 없어지고 난 후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거겠지?”

    “네. 다시 광장이 조성되었지만 그런 사건은 없었다고 합니다.”

    “……역시.”

    아브스 지역에서 흑마법을 이용해 만든 꽃이 존재했다.

    그럼 그다음은…….

    하인리시온의 생각이 깊어질 때였다.

    로웬이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그 당시 아브스 지역은 디케이든 후작가의 영지였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하인리시온 역시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에리스텔라는 오래전부터 흑마법의 존재를 인지하고 혼자서 그들을 쫓으며 상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마다 제멋대로 황궁을 나가 놀러 다니다가 저지른 사고로 위장한 것이고.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숨기고 있던 거구나.’

    그럼 네가 숨기고 있는 내 부모님의 죽음도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걸까.

    하인리시온이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릿속에 드는 강력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확인해야 할 곳이 있었다.

    “로웬. 나랑 함께 가 볼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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