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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7)화 (27/123)
  • 27.

    “드러나기는.”

    하인리시온이 로웬의 지적을 일축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로웬이 가느스름한 눈매로 하인리시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비슷한 일?”

    “예. 분명 있었습니다. 그때도 제가 한 소리…….”

    하인리시온에게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했었던 기억을 떠올린 로웬이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로웬이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번쩍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지금과 비슷했었습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전하께서는…….”

    로웬은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닌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

    어느새 하인리시온도 깨달았다. 로웬이 말하는 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지.

    “그토록 원망하면서도 황녀 전하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가셨죠.”

    에리스텔라의 만행 이후에 그녀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여전히 하인리시온은 가능성을 남겨 놓았었다.

    그때마다 로웬이 바랄 걸 바라라면서 답답해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황녀 전하의 사과를 받아 줄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로웬의 말이 맞았던 거다.

    “그런데 그걸 어째서 여우님께도 하고 계십니까.”

    로웬은 이쯤 되면 황당했다. 여우와 신경전을 하는 하인리시온이라니.

    “아무리 아끼셔도 고작 동물 아닙니까. 그런데 뭘 삐지고 그러십니까.”

    로웬은 하인리시온이 유치하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남이 알까 걱정입니다.”

    “나가!”

    하인리시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로웬에게 축객령이 떨어졌다.

    “네.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퇴근 시간도 한참이나 지나 있는데 저야 감사하죠.”

    하지만 로웬 역시 지지 않고 더욱 도발하며 돌아섰다.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붉어졌을 때였다.

    “화해하고 싶으시면 먼저 다가가십시오.”

    로웬이 완전히 나가기 직전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다.

    “그리고 고기 하나 나눠 주면 분명 좋아할 겁니다.”

    로웬이 자신 있게 제안했다.

    “여우님은 꽤나 단순한 면이 있더군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로웬은 완전히 집무실을 나섰다.

    흥분해서 책상을 짚으며 일어섰던 하인리시온이 허탈해하며 털썩 앉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하인리시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로웬이 한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단순한 모습을 봤다는 건데. 언제? 어디서?

    하인리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로웬이 한 손에 간식을 가득 들고서 집무실 끝 복도로 향했다.

    “여우님. 역시 오늘도 오셨네요.”

    로웬이 환하게 웃으며 간식을 내려놓았다.

    ‘당연하지. 멀리서부터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로웬은 처음에 여우를 못마땅해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간식을 갖다 바치기 시작했다.

    로웬과 에리스텔라의 은밀한 만남은 그때부터였다.

    ‘꼭 이거 때문에 용서한 건 아니고. 그냥 잘 지내면 좋은 거니까.’

    에리스텔라가 간식을 맛있게 한 입 앙 베어 물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녹는 것 좀 봐. 역시 이 맛이야.’

    에리스텔라가 한 입 두 입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여우님. 요즘 왜 집무실에 놀러 오지 않으세요?”

    로웬이 무릎을 굽혀 여우와 시선을 맞추며 달래듯이 물었다.

    오늘 간식을 가지고 찾아온 목적이 이거였나 보다.

    “저랑 같이 갈까요?”

    로웬이 팔을 뻗어 여우를 안아 들려고 하는 순간.

    쓰윽-에리스텔라가 뒷걸음질 치며 빠져나왔다.

    ‘내가 가면 더 싫어할걸.’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하인리시온이 원하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갈 수는 없어.’

    에리스텔라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경계하니 로웬이 항복하듯이 양손을 들었다.

    “건들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정말?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로웬이 먼 구석을 가리키며 해명했다.

    “정말요. 아니면 저 저어기로 물러나 있을까요?”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에리스텔라가 다시 간식에 열중할 때였다. 보좌관 중 한 명이 로웬에게 다가왔다.

    “오늘 밤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보고만 벌써 다섯 번째네.”

    로웬이 못 미덥다는 듯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긴 하지만…… 작은 신호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놓치는 것보다는 헛수고를 백 번 하는 게 나으니까.”

    두 사람은 여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은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에리스텔라는 그들의 대화를 편히 엿들을 수 있었다.

    “여우님. 맛있게 드세요. 다음엔 제가 다른 걸 가져다드릴게요.”

    로웬이 에리스텔라를 한 번 쓰다듬고서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요즘 밤마다 엄청 바쁘던데. 어딜 그렇게 가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점점 멀어지는 로웬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방금 보좌관과 나눴던 대화도 수상한데.

    ‘따라가 볼까.’

    여우의 짧은 다리가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높은 벽을 넋 놓고 바라봐야만 했다.

    ‘여길 어떻게 넘어가?’

    에이. 망할 벽!

    혼자서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라니.

    저택의 현관 쪽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여우가 접근하면 혼자서는 위험하다며 돌려보내거나 고용인을 불러 모셔가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에리스텔라는 혼자서 저택을 나갈 방법이 없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출입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개구멍 같은 데 없으려나.

    ***

    하인리시온은 집요했다. 그리고 로웬은 포기를 모르는 보좌관이었다.

    황궁에서 아주르디 백작이 그렇게 되고 난 후, 하인리시온은 곧바로 로웬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었다.

    아주르디 백작가를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르디 백작저 주변에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소속된 기사와 마법사가 교대로 잠복 중이었다. 로웬 역시 매일 밤 잠복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 아주르디 백작가의 저택 전체에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곳곳에 마력석을 박아 놓기까지 해서 감시를 피해 저택에 들어서는 것도 나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체 언제쯤 나오시려나.”

    로웬이 저택을 예의주시하며 지루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주르디 백작저를 감시하는 진짜 목적은 저택에 접근하는 수상한 자가 아니었다. 백작저 안에 숨어 있는 쥐새끼가 스스로 기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버티는지 그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그래서 아주르디 백작가의 고용인을 매수해서 미끼를 던져 놓았다.

    “이쯤 되면 백작가의 가보도 손에 넣었겠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도 알아냈을 테니, 오늘이야말로 움직이지 않고서야 못 버티겠지.”

    그때였다. 로웬이 가지고 있던 마력감지석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저택을 둘러싼 경계선을 넘을 때 반응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움직였구나.”

    마력감지석이 반응하는 곳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이제야 나오셨습니까.”

    로웬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가 흠칫하며 돌아봤다.

    “저택 전체에 결계를 치고 감시하는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매일 밤 이곳을 지키면서 허망하게 사라지는 돈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로웬이 감시하는 내내 품고 있었던 불만을 토로하자 상대방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그게 할 소리냐는 반응이었지만 로웬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곳에서 나오는 사람은 절대 곱게 보내 주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

    “드디어 뵙네요.”

    로웬의 미소가 차가운 달빛을 받아 더욱 광기에 젖어 보였다.

    ***

    로웬이 하인리시온에게 보고를 하러 온 건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예정대로 미끼를 던졌고 놈이 그걸 물었습니다.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였습니다.”

    홀로 집무실에 있던 하인리시온이 로웬의 보고에 눈썹만 까닥이며 물었다.

    “디케이든 후작이었나.”

    “그자가 맞았습니다. 지금 지하실에 가둬 놨습니다.”

    “역시 그랬나.”

    하인리시온이 예상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아차리신 겁니까?”

    “확신한 건 아니야.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어.”

    디케이든 후작은 하인리시온이 어릴 적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이였다.

    하지만 몇 년 전, 횡령 문제를 일으킨 후에 도망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르디 백작이 투자를 잘못해서 막대한 손해를 입는 일이 있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손해를 메꾸는 건 물론이고 큰 이익을 봤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하인리시온은 뭔가 수상하다고 여겨서 남몰래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디케이든 후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아마 디케이든 후작이 아주르디 백작에게 제안을 했을 것이다. 금전적 지원을 해 주는 대신 자신을 백작저에 머물게 해 달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있는 게 아니고 지난날의 정 때문에 하인리시온이 모른 척 넘어갔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죽기 얼마 전부터 좋은 인연을 만났다면서 새로운 투자에 대해 떠들고 다녔지. 그래서 아마 디케이든 후작이 여전히 저택에 머물고 있는 중이구나 짐작했었어.”

    설마 그게 흑마법으로 연결되어 있는 줄은 모른 채.

    “어떻게 할까요? 제가 먼저 상대한 다음에 보고를 올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보지.”

    하인리시온은 바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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