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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6)화 (26/123)
  • 26.

    대공저로 돌아온 하인리시온을 가장 먼저 반긴 것도 그였다. 비통에 빠져 있는 하인리시온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알려준 것 역시 노집사였다.

    하인리시온이 고민 끝에 노집사를 호출했다.

    “전하. 저를 찾으셨다고요.”

    하인리시온은 앞에 있는 노집사를 바라봤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아델라시아 대공저를 보살피던 그는 하인리시온에게도 고용인 그 이상의 존재였다.

    또한, 저택에 있는 이들 중 그날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 집사도 장례에 관여하지 못했었지. 그럼 두 분의 시신도 전혀 보지 못했었나?”

    “멀리서 잠깐 뵌 게 전부였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제에 노집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차분하게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에리스텔라 황녀의 등 너머로 선대 대공 부부의 시신이 놓여 있는 걸 스치듯이 본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곧바로 황녀가 가리는 바람에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다음 황녀 전하께서 바로 저택을 봉쇄하시는 바람에 저희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노집사는 선대 대공 부부를 지켜 드리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하인리시온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에리스텔라의 만행으로 장례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충격이 너무 컸다. 그래서 놓치고 간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당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혹시 그 전후로 두 분한테서 이상한 점은 없었나?”

    하인리시온의 물음에 노집사의 눈꺼풀이 떨렸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거든. 혹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군.”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더욱 채근했다.

    “갑자기 그날 일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혹시 예전처럼 다시…….”

    “아냐. 내가 뭔가 놓친 것 같아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하인리시온의 말에 노집사가 신중하게 그 당시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 작은 의문을 꺼냈다.

    “그저 제가 나이가 들어 별거 아닌 일에 의미를 두는 것뿐일 겁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고 읊조리며.

    “그래도 상관없어.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하인리시온은 담담하게 노집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던 노집사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떠나 계시는 동안 대공비 전하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셨었습니다. 거의 일어나시지를 못하셨죠.”

    “…….”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도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고 대공비 전하를 돌보느라 두문불출하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건 그 당시 서신으로도 소식을 전달받은 적 있었다. 원래도 몸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괜찮아지시는 듯싶더니 갑자기 나빠지셨다고.

    하인리시온은 하던 일마저 접고 돌아가려 했으나, 당시의 대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서신을 보냈었다.

    그래서 다시 괜찮아지셨나 싶었는데, 비보가 들려온 것이다.

    역시나 그날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기에 하인리시온은 더더욱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전하께서 떠나 계시는 동안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황녀가?”

    하인리시온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장례식 전에도 찾아왔었다니.

    그건 꼭 마치…… 미리 알았던 거 같잖아.

    하인리시온의 심장이 술렁이고 어지러워졌을 때였다.

    “대공 전하를 찾아오셨었는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하인리시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맞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노집사에게 나중에라도 뭔가 생각나면 알려 달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리고 이건…… 제가 본 거라고 하기에도 그렇습니다만. 아니, 제 착각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

    노집사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음…… 황녀 전하를 배웅할 때 제가 얼핏 뭔갈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가 잘못 봤을 겁니다.”

    대체 뭘 봤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인리시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녀 전하께서 우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제가 헛것을 본 거겠지요. 그때도 이미 눈이 어두침침했으니까요.”

    부정하고는 있지만 그 모습을 잊지 못하고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착각이었을지언정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인리시온은 그 말을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어쩐지 그 당시 에리스텔라가 방문한 이유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 이유가 뭔지 알듯도 싶어서.

    그는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아져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니 생각할 시간이 넘쳐나서 탈이죠. 그런 노인네의 노파심에 불과한 것들이에요. 마음에 두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노집사가 하인리시온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말했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 혼란을 주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하인리시온이 노집사의 근심을 덜어내 주기 위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던 노집사가 뭔가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때 황녀 전하께서…… 다쳤었던 거 같은데.”

    대공가에 올 때 이미 다쳤던 건지 아니면 그 이후에 다쳤던 건지 확실하지 않아서 놓치고 있던 기억이었다.

    하인리시온이 원하는 정보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다시 가서 말씀드리는 게 좋으려나.”

    노집사가 고민 끝에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뭔가가 그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여우님?”

    에리스텔라가 노집사를 빤히 올려다보며 앞발로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가지 마.’

    “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부름에 노집사가 급하게 가는 걸 보고 괜한 불안감에 쫓아왔었다.

    그리고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건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 없는 일이야.’

    에리스텔라가 열심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붙잡아 보았지만, 노집사에게까지 닿을 리 없었다.

    “흐음. 고용인을 불러야 하나. 도통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안 돼. 노집사는 분명 고용인을 부르고 다시 하인리시온에게 갈 거다.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야 보고하는 것도 잊어버릴 텐데.

    에리스텔라가 노집사를 어떻게 붙잡을까 고민할 때였다.

    콰과광!

    하늘이 요란하게 번쩍이며 천둥 번개가 내려쳤다.

    ‘깜짝이야!’

    저택을 덮칠 것처럼 큰 소리에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노집사의 구두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이 많이 안 좋지. 혹시 무서워서 그러십니까?”

    에리스텔라가 털을 곤두세우며 오들오들 떠는 척했다.

    “허허. 제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요. 이리 오세요.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노집사가 여우를 감싸 안으며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을 보호하듯이 귀를 감싸 주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포근해서 무심결에 몸을 완전히 맡겨 버리고 말았다.

    ***

    기나긴 밤이 지나 해가 뜨고 집무실은 평소처럼 보좌관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허전함이 집무실 내에 감돌고 있었다. 뭔가 모자란 것 같은 기분. 그 원인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요즘 따라 여우님이 바쁘네요. 원래는 전하가 계신 곳에 늘 있었는데요.”

    하지만 최근에는 그 반대였다.

    하인리시온이 있는 곳에서는 여우를 절대 볼 수 없었다.

    “요즘엔 전하 근처에서 여우님을 보기가 힘드네요.”

    아네사를 비롯해 여우에게 관심이 많은 보좌관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은근히 하인리시온이 대답해 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얼마 전부터, 아니다. 정확히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을 피해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인리시온 역시 지난번 도서관에서 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 보니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여우에 갇힌 몸을 원래대로 돌리는 건 거의 접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가문에서도 극비로 다루는 서적 중에서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생각에 잠긴 하인리시온의 볼펜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문을 한 번 힐긋거리고 창문 밖으로 한 번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는 못했는지 기운 없는 모습으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애써 참던 로웬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전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뭐가.”

    하인리시온이 영혼 없이 되물었다.

    “하루 종일 화를 내시면서도 은근히 여우님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로웬이 직설을 날렸다.

    “솔직해지십시오. 여우님이 전하께 안 오니까 서운하시잖아요.”

    로웬의 쐐기를 박는 말에 다른 보좌관들 역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래.”

    그 모습을 본 하인리시온이 눈을 치켜뜨며 부정했다. 차라리 긍정에 가까운 강한 부정이었다.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

    “전하께서는 본인 속내가 은근히 얼굴에 드러나는 걸 모르시나 봅니다.”

    멈칫.

    하인리시온의 눈동자가 천천히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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